쓰고있는글들/금요일 : 유럽의 통치 가문들

유럽의 통치 가문들...(67) 호엔슈타우펜 가문 : 황제의 가문

엘아라 2022. 9. 23.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벨프 가문이야기를 할려고 했는데 그게 뭐랄까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통치 내내  벨프 가문이랑 엮여서 차라리 프리드리히 바르바롯사가 황제가 되는 이야기까지 하고 나서 할까합니다.

 

유럽의 통치 가문들...(67) 호엔슈타우펜 가문 : 황제의 가문 

 

1137년 콘라트 3세는 황위의 후계자인 로마인의 왕의 지위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강력한 경쟁자는 황제 로타르 3세의 사위였던 벨프 가문 출신의 바이에른 공작이자 작센의 공작이었던 하인리히 10세였습니다. 하인리히 10세는 콘라트 3세의 형인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2세의 처남이었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당연히 처남보다는 동생인 콘라트를 지지했었습니다. 콘라트 3세는 하인리히 10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하인리히 10세의 두개의 공작령을 모두 몰수해버립니다. 그는 로마인의 왕으로 바이에른 공작과 작센 공작의 상위군주였으며 그 공작령을 누구에게 수여하는가는 당연히 상위 군주의 뜻에 따라 결정할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물론 그 지역의 영주들이 공작을 받아들이는 가는 별개문제였지만 말입니다.그리고 이것은 바로 오래도록 시작되는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벨프 가문의 갈등의 시작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콘라트 3세는 하인리히 10세의 공작령들을 자신의 측근들에게 배분하게 됩니다. 바이에른 공작령은 자신의 이부동생인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4세에게 줬으며 작센 공작령은 자신의 측근이었던 브란덴부르크의 마르크그라프였던 알브레히트 데어 배르에게 줘버렸습니다. 당연히 하인리히 10세는 가만히 있지 않았고 자신의 영지를 되찾기 위해 전쟁을 시작했었습니다. 하지만 하인리히 10세가 젊은 나이에 사망하면서 벨프 가문의 힘은 조금씩 줄어들었고 콘라트 3세는 자신의 힘을 안정시킬수 있었습니다. 

 

두 신하들과 함께 있는 콘라트 3세

 

콘라트 3세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에게 감동을 받았으며, 프랑스의 국왕 루이 7세와 함께 제 2차 십자군 원정에 동참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는 십자군 전쟁을 떠나기전 자신의 장남인 하인리히 베렌가르를 자신의 후계자로 확정지었으며 심지어 공동국왕으로  대관식까지 거행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콘라트 3세가 만약 십자군 원정에서 사망하더라도 공동 국왕의 지위를 가지고 있던 장남이 자연스럽게 단독으로 로마인의 왕이 될수 있게 했던 것이었습니다. 아들의 지위를 확보한것은 성공적이었지만 콘라트 3세의 십자군 원정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에 감명을 받은 콘라트 3세

 

콘라트 3세가 독일로 돌아왔을때 그의 실패는 널리 알려졌으며 이것은 그의 왕권을 약화시키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용감한 아들인 하인리히 베렌가르가 있었으며 그는 가문의 숙적이었던 벨프 가문 출신의 토스카나의 마르크그라프였던 벨프 6세와 벨프 7세를 무찌르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보다 미리 사망했으며 콘라트는 후계자를 잃은 상실감을 느껴야했습니다.

 

콘라트 3세는 처음으로 황제로 즉위하지 않은 로마인의 왕이었습니다.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로마로 가야했었는데 콘라트 3세의 측근들은 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그에게 로마로 가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아들인 프리드리히를 로마인의 왕으로 즉위시킨후 로마로 가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2차 십자군 전쟁에서 말라리아에 걸렸으며 이것은 그의 건강을 악화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아들을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하는 회의가 열리기 직전인 1152년 2월 말라리아로 사망했습니다. 

 

콘라트 3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후에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4세

 

콘라트 3세가 죽은 3주후인 1152년 3월 독일의 제후들은 로마인의 왕을 선출했고 여기에는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프리드리히가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콘라트 3세의 아들이 아니라 조카이자 슈바벤 공작이었던 프리드리히 3세 바르바롯사였습니다. 

 

"붉은 수염"이라는 뜻의 바르바롯사라는 별명이 붙은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3세는 사촌인 프리드리히를 대신해서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됩니다. 프리드리히의 명분은 황위를 다투던 두개의 가문인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벨프 가문 모두의 후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호엔슈타우펜 가문 출신의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2세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벨프 가문 출신으로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9세의 딸이자 하인리히 10세의 누나였던 바이에른의 유디트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프리드리히는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하기 위해서 벨프 가문쪽 세력을 끌어들인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로마인의 왕이 되고 사촌으로 작센의 공작이었던 하인리히 데어 뢰베에 대해서 한 것을 보면 잘 알수 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하인리히 데어 뢰베가 원했던 가문의 또다른 영지인 바이에른 공작령을 결국 하인리히 데어 뢰베에게 부여해줬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바르바롯사가 로마인의 왕이 되면서 슈바벤 공작령은 자신에게 로마인의 왕의 지위를 뺏긴 사촌 프리드리히에게 넘겨줬으며 그는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4세가 됩니다.

 

프리드리히 바르바롯사

 

그리고 1155년 프리드리히 바르바롯사는 로마로 갔고 황제 프리드리히 1세로 즉위했습니다. 하지만 이때 이미 그는 이전에 좋은 관계였던 사촌 하인리히 데어 뢰베와 틈이 벌어지고 있었으며 이것은 벨프 가문과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기나긴 갈등이 심화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