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사실 이 가문은 자료가 없거든요
그래서 신나서 합니다. -0-;;;;
...그런데 합스부르크 가문 이야기랑 같이 쓰니까 이거 막 헷갈리네요. 루돌프 1세 시대는 로타르 3세보다 훨씬 뒤의 이야기인데 쓰다보니 어랏 왜 로타르 3세가 황제가 될수 있었지 대공위시대 아니었나..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고 말입니다..ㅠ.ㅠ
유럽의 통치 가문들...(64) 슈플린부르크 가문 : 황제 로타르 3세의 가문
로타르 3세의 출신 가문으로 가문의 영지였던 쉬플링겐부르크에서 유래된 슈플린부르크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는 가문은 사실 그리 강력한 가문이 아니었으며 또 오래도록 지속되는 가문도 아니었습니다. 특히 로타르 3세에게는 딸이 한명밖에 없었기에 가문은 그 딸로 끝나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가문의 선조는 11세기 인물이었던 루이트게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1013년 그라프로 알려졌으며 특히 1021년에는 하르츠가우의 그라프로 알려지게 됩니다. 그는 1031년 사망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루이게르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루터라는 아들은 노르트튀링겐가우과 데어링가우의 그라프였다고 합니다.그리고 다른 아들인 베른하르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하르츠가우의 그라프가 됩니다. 아마도 루터의 지위는 조카인 베른하르트의 아들이 물려받는 것으로 봐서 루터에게는 아들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할수 있을듯합니다.
베른하르트에게는 역시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디에트마르라는 아들은 할버슈타트의 주교가 되었었습니다. 또다른 아들인 게베하르트는 하르츠가우와 노르트튀링겐가우의 그라프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는 포름바흐의 헤드비히였는데 아마도 헤드비히와 베른하르트가 결혼하면서 가문의 이름이 되는 쉬플링겐부르크 성을 얻게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헤드비히는 남편인 베른하르트가 전사하자 이후 로렌의 공작이었던 테오도릭 2세와 재혼했다고 합니다.
로타르의 아버지는 아마도 로타르가 태어난 직후나 아니면 태어나기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바로 재혼한것으로 추정됩니다. 로타르의 어린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바가 없는데 아마도 그의 가문의 이름의 유래가 되는 쉬플링겐부르크 성에서 성장했다고 알려져있다고 합니다.
로타르는 주변 영지들을 합병해갑니다. 특히 노르테임의 상속녀였던 리헨차와 결혼하면서 노르테임 지역등을 상속받았으며 또한 다른 지역들 역시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서 합병을 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로타르는 작센 지방에서 최고로 부유한 영주가 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부를 발판으로 그는 세력을 확대해나가기 시작합니다. 특히 황제 하인리히 5세가 아버지인 하인리히 4세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켰을때 그를 지지했으며 결국 하인리히 5세가 황제가 되면서 로타르 역시 이익을 얻게 됩니다. 작센의 공작 마그누스가 죽자 하인리히 5세는 작센의 공작령을 마그누스의 사위로 벨프가문 출신이었던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9세에게 주지 않고 로타르에게 주게 됩니다.
작센 공작령을 얻은 로타르는 이제 이를 발판으로 더 높은 지위를 얻을 기회를 잡게 됩니다. 바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위였습니다. 황제 하인리히 5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고 잘리어 가문이 단절되면서 독일내 영주들은 황제를 새로 뽑아야했습니다. 그리고 강력한 힘을 가진 가문 사람들은 이 황위에 도전하게 됩니다. 로타르 역시 황제의 지위에 도전하는데 사실 그의 강력한 경쟁자는 호엔슈타우펜 가문 출신의 슈바벤 공작이었던 프리드리히 2세였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강력한 영주로 황제가 될것이 유력해보였지만 로타르는 여러 세력을 끌어들입니다. 이를테면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2세의 장인으로 로타르에게 작센 공작령을 뺏긴것으로 생각했던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9세에게 로타르는 접근합니다. 하인리히 9세는 당연히 사위를 지지하려했었는데, 로타르는 자신의 외동딸인 쉬플링겐부르크의 게르트루트를 하인리히 9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하인리히 (후에 바이에른의 공작 하인리히 10세)에게 시집보내면서 지참금으로 작센 공작령을 주기로 합니다. 이것은 하인리히 9세가 원하던 작센 공작령을 손에 넣는 동시에 아들이 황제의 사위로 황위에 오를 기회마저 얻을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기에 하인리히 9세는 사위가 아닌 로타르를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로타르는 약속대로 딸을 하인리히 9세의 아들에게 시집보냈습니다.
로타르3세는 남성후계자가 없었기에 결국 그의 가문은 그의 대에서단절되게 됩니다. 로타르 3세의 유일한 딸이었던 쉬플링겐부르크의 게르트루트는 바이에른과 작센의 공작이었던 하인리히 10세와 결혼했으며 둘 사이에서는 유일한 아들인 하인리히 데어 뢰베가 태어났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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