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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통치 가문들...(62) 잘리어 가문 :황제 하인리히 3세와 하인리히 4세
잘리어 가문 출신으로 첫 황제가 된 콘라트 2세는 황제가 된 후부터 자신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하인리히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일을 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일이 바로 자신이 황제가 된 직후인 1028년 하인리히를 동공국왕으로 즉위식을 거행하도록 했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죽더라도 아들이 국왕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유리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인리히는 아버지인 콘라트 2세가 죽은뒤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로마인의 왕"이 되었습니다.
하인리히의 아버지인 콘라트 2세는 아들에게 바이에른,슈바벤 그리고 카린시아 공작령을 부여했고 이것은 하인리히가 제국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는 중요한 요인중 하나로 작용했습니다. 하인리히는 제국내 여러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을 국왕으로 인정하게 만들었으며, 아버지와 갈등을 빚던 보헤미아와 헝가리에 대해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또 이전에 갈등을 빚고 있었던 로렌 공작들에 대한 투쟁에서 승리하기도 했었습니다.
제국내 안정을 확인한뒤 하인리히는 1046년 이탈리아로 갔으며 이곳에서 혼란한 교회의 상황을 정리하고 자신의 측근이이었던 클레멘스 2세를 교황으로 즉위시켰으며 그 역시 황제 하인리히 3세로 대관식을 올렸습니다.
황제가 된 직후 독일로 돌아온 하인리히 3세는 모든 것이 다 좋은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1053년 3살이었던 아들 하인리히를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하게 만들었고 아들을 후계자로 확고히 한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인리히 3세에 대한 반발이 커지게 됩니다. 헝가리와의 지속적인 전투에서 패배하기도 했고 다시 원정에 나서기도 했었기에 이런 상황은 황제에 대한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좋은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하인리히 3세는 1056년 40살이 되기 직전에 사망하게 됩니다. 하인리히 3세는 두번 결혼했었는데 첫번째 아내는 덴마크의 군힐다로 잉글랜드와 덴마크,노르웨이등을 통치했던 크누트 대왕과 그의 아내인 노르망디의 에마의 딸이었습니다. 독일식으로 쿠니쿤데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군힐다는 딸 한명만 두고 전염병으로 일찍 사망했습니다. 첫번째 아내가 죽은뒤 하인리히 3세는 푸아투의 아그네스와 재혼했습니다. 아그네스는 아키텐 공작이었던 기욤 5세와 그의 아내인 부르고뉴의 아그네스의 딸로 아그네스와 하인리히 3세의 결혼은 부르고뉴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강했다고 합니다. 푸아투의 아그네스와 하인리히 3세와의 사이에서는 여러 자녀들이 태어났는데 그중 아들인 하인리히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황제 하인리히 4세가 됩니다.
하인리히 4세는 아버지가 죽었을때 5살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국왕으로 이미 즉위했었기에 국왕으로 권리가 있었습니다만 어렸기에 섭정이 필요했었습니다. 그렇기에 하인리히 4세의 어머니인 푸아투의 아그네스가 아들의 섭정으로 제국을 통치했었습니다만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아그네스는 영주들을 억압할수 없었고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서 이익을 제공해야했습니다. 게다가 남편과 달리 교황을 통제할수 없었기에 교회에 대한 영향력 역시 너무나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아그네스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일단의 사람들이 결국 아그네스에 대한 쿠데타를 계획합니다. 1062년 쾰른의 대주교인 안노 2세를 중심으로 하인리히 4세를 납치하게 됩니다. 아그네스는 아들을 풀려나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섭정지위에서 물러나서 수녀원으로 갔으며 섭정 지위는 퀼른의 대주교, 마인츠의 대주교,브레멘의 대주교가 맡게 됩니다.
하인리히 4세는 아마도 자신을 강제적으로 납치한 쾰른의 대주교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을 것이며 1065년 성인으로 인정되어서 친정을 하게 되자 제일 먼저 쾰른의 대주교를 공격했습니다. 쾰른의 대주교는 결국 궁정에서 물러나야했습니다. 하인리히 4세의 어머니인 아그네스는 아들이 친정을 한 뒤 다시 궁정으로 돌아왔지만 곧 로마로 떠나게 됩니다. 아마도 이것은 정치적 목적이 강했을 것인데 아그네스는 이후 황제와 교황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하인리히 4세는 섭정들이 통치했던 시기의 여러가지를 다시 되돌리려했습니다. 그는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조치를 취했는데 그중 하나가 작센 지방에 대한 통치였습니다. 새로운 관리들을 파견해서 기존 세력을 압박했기에 당연히 작센의 영주들이 반발을 하게 됩니다. 게다가 독일내 성직자에 대한 임명 권리를 황제가 가져야한다는 생각을 가졌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독일내 고위 성직자들 역시 제국내 영주였으며 황제의 신하였기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교회와 교황의 반발을 가져오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작센지역에서의 갈등은 결국 작센지역에서의 반란으로 이어졌으며 하인리히 4세는 결국 작센 지방을 평정하게 됩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하인리히 4세는 이제 교황과의 싸움으로 확대합니다. 성직자의 임명문제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하인리히 4세는 갈등했으며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의 측근 성직자들과 함께 교황의 퇴위를 주장했고, 교황은 하인리히 4세를 파문했으며 신하들이 황제에 충성하지 않아도 된다고 선언하게 됩니다.
하인리히 4세가 파문당하자 성직자들 대부분이 그에게서 등을 돌렸으며, 그를 반대하던 영주들이 힘을 얻게 됩니다. 결국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을 인정해야했으며, 참회자로 슈파이어에가서 숨죽여지내게 됩니다. 1078년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결국 교황에게 용서를 빌러 가길 결정합니다. 혹독한 겨울이었지만 하인리히 4세는 황후와 자신의 측근들을 데리고 이탈리아로 갔습니다. 이때 교황은 하인리히4세가 쳐들어올것을 두려워해서 강력한 토스카나 여후작이었던 토스카나의 마틸다가 있던 카놋사 성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하인리히 4세는 카놋사 성에서 3일간 거친옷을 입고 맨발로 용서를 빌었으며, 교황 주변 사람들은 교황에게 황제를 용서하라고 설득하게 됩니다. 결국 교황은 하인리히 4세에게 교황의 뜻을 받아들이겠다는 서약을 한뒤 사면받게 됩니다.
하인리히 4세가 이탈리아에서 교황의 사면을 받은뒤 하인리히의 반대세력들은 당황하게 됩니다. 이들은 하인리히가 사면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하면서 대립 국왕으로 라인펠트의 루돌프를 선출하고 교황의 사절단이 이를 인정해버립니다. 이에 대해서 하인리히 4세는 당연히 반발했으며 그를 사면한 교황은 중립을 유지합니다. 하인리히 4세는 황제로 루돌프의 지지자들을 모두 처리했으며 바로 독일로 돌아갑니다. 또 자신이 사면받은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 여러곳을 돌아다녔으며 자신의 반대자들을 처리하고 지지자들에게 돈을 지급하는 등의 일을 합니다. 결국 루돌프와 하인리히 4세의 군대가 대치하게 되는데 이때 양측 영주들은 전쟁을 원치 않았고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회의를 열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이 회의에 교황의 사절이 나타나 하인리히 4세가 파문을 사면받았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게 됩니다.
상황은 계속해서 복잡하게 흘러가는데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의 반대자들을 계속해서 교체해나가게 됩니다. 특히 성직자들에 대한 교체마저 이루어지게 되고 이렇게 되자 교황은 다시 한번 하인리히 4세에 대해서 불만을 품게 됩니다.1080년 하인리히 4세는 교황에게 자신의 적대자인 루돌프의 파문을 요구했고, 그렇지 않으면 교황지위에서 끌어내리겠다고 위협합니다. 이렇게 되자 교황은 다시 한번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루돌프를 적법한 국왕이라고 선언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인리히 4세는 이전과 달리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080년 5월 마인츠 공의회를 열어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반교회적인물이라고 규정하고 교황이 아니라고 했으며 대립교황인 클레멘스 3세를 내세우기까지 합니다. 동시에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의 정적인 루돌프를 결국 패배시켰습니다.
하인리히 4세의 지지자들은 교황의 보호자였떤 토스카나의 마틸다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으며 결국 하인리히 4세는 1081년 별 저항없이 이탈리아로 입성할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 대한 충성이 강했기에 로마를 굴복시킬수 없었고 독일로 물러나야했습니다. 이후 계속된 시도 끝에 결국 1084년 많은 추기경들이 그레고리오 7세를 버리고 하인리히 4세를 지지했으며 이렇게 되자 로마 역시 저항을 포기하게 됩니다. 하인리히 4세는 로마로 입성했고 대립교황 이었던 클레멘스 3세가 교황이 되었고, 하인리히 4세는 황제로 대관하게 됩니다.
하인리히 4세는 이제 황제가 되었으며 황제가 된 다음해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사망하면서 좀더 유리한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제국내에서는 여전히 그에게 반발하는 세력이 있었으며 또 이탈리아에서 강력한 영주였던 토스카나의 마틸다가 클레멘스 3세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레고리오 7세의 후계자로 선출된 빅토르 3세는 비록 화해 원하긴했지만 그레고리오 7세가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한 것을 취소하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이런 상황은 하인리히 4세에게 다시 한번 위협으로 다가옵니다. 특히 벨프 가문이 하인리히 4세에게 반기를 들었으며 토스카나의 마틸다와 그녀의 남편으로 벨프 가문 출신이었던 바이에른의 벨프가 이탈리아 내에서 하인리히를 적대시했으며 그의 가족들을 회유하게 됩니다. 아들인 콘라트는 아버지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었으며 그의 아내인 키예프의 아델하이트(키예프의 유프라시아)가 남편에게 감금당한것을 이용해서 그녀를 도망치게 해준대신 하인리히 4세가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짓을 했다고 증언하게 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벨프가 아내인 토스카나의 마틸다와 헤어지고난뒤 벨프 가문과 황제는 다시 화해하게 됩니다.교황과의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지만 독일내에서 하인리히 4세의 반대 세력은 하인리히 4세보다 약했었습니다.
하인리히 4세의 아들인 콘라트는 아버지에 대해서 반항적이었기에 결국 후계자 자리에서 쫓겨났고 콘라트의 동생인 하인리히가 로마인의 왕이 됩니다. 하지만 하인리히 4세가 늙어가자 젊은 하인리히는 아버지를 밀어내게 됩니다. 파문당한 아버지의 권위가 자신의 권위보다 크지 않다고 여겼을 것이며 또한 그는 자신의 세력을 확고히 하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결국 젊은 하인리히는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독일내 영주들은 당장 젊은 하인리히 편으로 가게 됩니다. 결국 하인리히 4세는 1105년 아들인 젊은 하인리히에게 밀려나 양위해야했습니다.
하인리히 4세는 퇴위후 위험때문에 쾰른으로 가게 됩니다. 쾰른에서는 하인리히 4세의 충성스러운 지지자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황제가 다시 복귀하길 바랬었습니다. 하인리히 5세는 당연히 이들을 처벌하려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하인리히 4세는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는 갑작스럽게 사망했으며 죽기전 아들에게 자신의 지지자들을 용서해주고 자신을 조상들 곁에 묻게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인리히 5세는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교황과 협상했으며 결국 파문을 철회해주었기에 죽은지 4년후인 1111년 하인리히 4세는 아버지 하인리히 3세 곁에 묻힐수 있었습니다.
하인리히 4세는 두번 결혼했는데 첫번째 아내는 사보이의 베르타로 어린시절 약혼해서 함께 자란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하인리히 4세는 이 약혼에 대해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죽을뻔한 이후 후계자 문제때문에 서둘러 결혼했기에 베르타에 대해서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인리히 4세는 베르타와 헤어지길 요구했지만 베르타의 어머니인 수사의 아델라이드는 매우 강력한 영주였으며 당대에는 토스카나의 마틸다와 비교될 정도의 여성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강력한 영주의 딸인 베르타와 헤어지는 것은 어려웠으며 결국 하인리히 4세는 베르타와 결혼생활을 지속해야했었습니다. 하인리히 4세와 베르타 사이에서는 다섯명의 아이가 태어나는데 이중 두 아들인 콘라트와 하인리히 그리고 딸인 아그네스가 있었습니다. 콘라트는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었었지만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패배했었으며 이후 권력에서 밀려났씁니다. 다른 아들인 하인리히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황제 하인리히 5세가 됩니다. 아그네스는 두번 결혼하는데 그중 첫번째는 호엔슈타우펜 가문 출신으로 슈바벤 공작이었던 프리드리히 1세와 결혼했고 그녀의 아들인 콘라트는 후에 로마인의 왕이 되었습니다.
하인리히 4세의 두번째 아내는 키예프의 유프라시아로 작센 지방의 영주중 한명과 첫 결혼했었습니다. 남편이 죽은뒤 수녀가 되었는데 수녀원에서 작센 지방에 대한 반란을 평정하려하던 하인리히 4세를 만나게 됩니다. 아름다운 유프라시아에게 반했다고 알려져잇는데 아내인 사보이의 베르타가 1087년 사망한뒤, 1088년 재혼했습니다. 유프라시아는 하인리히 4세와 결혼한뒤 아델하이트라는 독일식 이름을 쓰게 됩니다. 하인리히 4세가 1090년 이탈리아로 갔을때 유프라시아를 간통혐의로 감금했으며 유프로시아는 남편의 적인 토스카나의 마틸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탈출후 남편이 자신에게 난교를 강요했으며 심지어 아들인 콘라트와도 잠자리를 하라고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후에 유프라시아는 이 주장을 철회했지만 더이상 남편과는 함께 지내지 않았으며 이탈리아에서 헝가리로 갔다가 고향인 키예프로 돌아갔으며 남편이 죽은뒤 수녀로 살았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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