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오토 가문은 황제들 이야기 읽기 싫었거든요. 그래서 대충 넘어갔는데 잘리어 가문은 뭐랄까 교황과 황제의 갈등이 본격 시작되는 파트라서 그런지 막 읽고 싶어져서 많이 읽었습니다. -0-;;;
그래서 이렇게 길어졌네요 쿨럭
유럽의 통치 가문들...(63) 잘리어 가문 : 하인리히 5세와 마지막
황제 하인리히 5세는 형인 콘라트가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지위를 박탈당한뒤 아버지인 하인리히 4세에 의해서 후계자로 선출되었습니다. 하인리히 5세는 형과 달리 아버지의 정책에 크게 반대하지 않고 조용히 지냈었습니다. 하지만 하인리히 4세는 점차 신하들과 마찰을 빚게 되었으며 하인리히 5세는 아버지와 신하들 사이에서 선택해야했을 것입니다. 결국 하인리히 5세는 아버지와 결별하고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으며 많은 영주들이 하인리히 5세를 지지합니다.결국 하인리히 4세는 퇴위하고 하인리히 5세가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으며 1106년 하인리히 5세는 로마인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게 됩니다. 하인리히 4세는 아들에 대항해서 군대를 모으고 투쟁을 했지만 결국 1106년 사망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하인리히 5세는 확고한 지위를 굳히게 되었습니다.
하인리히 5세는 초기에는 영주들과 잘 지냈으며 이것은 제국이 안정되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하지만 성직자에 대한 임명권을 황제와 교황사이의 갈등요소로 작용했으며 결국하인리히 5세는 이문제를 해결하고 황제로 대관하기 위해서 이탈리아로 가게 됩니다. 1110년 하인리히 5세는 이탈리아로 떠났으면 1111년 로마로 향하는 길을 마련합니다. 특히 강력한 영주였던 토스카나의 마틸다가 하인리히 5세에게 길을 허락했기에 당시 교황 파스칼 2세는 지지세력이 없었으며 결국 황제와 화해를 모색하게 됩니다. 파스칼 2세는 황제가 성직 임명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성직자가 가지고 있던 영지들을 황제의 소유로 귀족시키는데 합의를 봤으며 이로써 하인리히 5세는 황제로 즉위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하지만 주교들은 황제와 교황사이의 협약을 알게 되었고 소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결국 하인리히 5세는 교황을 사로잡았으며 대관식을 진행하도록 강요했고 결국 1111년 4월 13일 황제로 대관했습니다.
하인리히 5세는 이전에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위해서 1110년 잉글랜드의 국왕이자 노르망디 공작이었던 헨리 1세의 딸인 마틸다와 약혼했었으며 4년후인 1114년 마틸다와 하인리히 5세는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1120년 마틸다의 남동생이었던 윌리엄 애설링이 화이트쉽 난파사건으로 사망하면서 마틸다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의 상속자로 부상하는데 하인리히 5세는 마틸다의 남편으로 이를 지지했었습니다. 물론 하인리히 5세는 이 지역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하인리히 5세는 독일로 돌아온뒤 반대세력에 부딪히게 됩니다. 교회에서는 당연히 황제를 파문했으며 황제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제후들은 이 기회를 통해서 황제에게 반기를 들게 됩니다. 이런 갈등 상황에서 1115년 토스카나의 마틸다가 사망하면서 상황은 복잡하게 됩니다. 후계자가 없던 마틸다는 이전에 황제와 계약을 맺었었는데 그녀의 영지를 황제에게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전에 마틸다는 자신의 재산을 교회에 헌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었으며 이것은 곧 그녀의 영지를 두고 황제와 교황이 다툼을 하는 원인이 됩니다. 하인리히는 당연히 자신이 마틸다의 영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다시 이탈리아로 가게 됩니다. 또 이탈리아 내에서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서 노력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교회세력과 황제 세력간의 투쟁은 지속되었으며 결국 1122년 보름스 협약을 체결하면서 둘의 갈등은 일단락됩니다. 황제는 성직임명권을 포기하지만, 대신 교황은 성직자들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문제에 부딪힐때 황제의 관리등을 받아들여서 황제의 권한이 그들이 통치하는 영지나 그들의 세속적 권리를 장악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인리히 5세는 1125년 사망했으며 아내인 잉글랜드의 마틸다(모드)와의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하인리히 5세를 끝으로 더 이상의 남성후계자가 없었기에 잘리어 가문은 단절되게 됩니다.
잘리어 가문이 통치하던 시기의 제국은 성직 임명권을 두고 다툼을 하던것으로 유명합니다. 물론 통치 초기에는 황제가 교회와 협력관계였었지만,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면서 제후인 주교들을 제압해야했으며 이것은 결국 황제와 교황간의 서임권을 두고 다툼을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역시 잘리어 가문 통치기에 이 서임권을 두고 다툼을 하던 것이 정리되었습니다.
잘리어 가문의 남성 직계는 황제 하인리히 5세를 끝으로 막을 내리지만, 여성 후손을 통해서 가문의 혈통은 황제 가문으로 이어집니다. 호엔슈타우펜 가문 출신으로 로마인의 왕이 되는 콘라트 3세의 어머니인 바이블링겐의 아그네스는 황제 하인리히 4세의 딸이자 하인리히 5세의 누나이기 때문입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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