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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통치 가문들...(65) 호엔슈타우펜 가문 : 기원

엘아라 2022. 9. 9.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호엔슈타우펜 가문이군요. 음냐

 

유럽의 통치 가문들...(65) 호엔슈타우펜 가문 : 기원

 

호엔슈타우펜 가문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있지만 최근에는 "슈타우퍼Sutauper"가문이라는 이름으로 써야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 가문은 12세기와 13세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위를 이어간 가문이었습니다.  사실 호엔슈타우펜 가문이라는 용어는 당대가 아니라 14세기 이후부터 쓰여진 말로 슈바벤에 있는 가문의 성인 "호엔슈타우펜 성"으로부터 나왔는데 이곳은 원래 산 이름이 슈타우펜 산이었지만 높다는 의미의 hohen이 붙어서 호엔슈타우펜 산이라고 알려졌고 성 이름도 호엔슈타우펜 성으로 알려지게 된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당대에 쓰던 가문의 이름인 슈타우퍼라는 이름을 써야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호엔슈타우펜 성, 14세기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선조는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롯사의 아버지인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가 기록에 남아있는 첫번째 조상이라고 합니다.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의 가계는 애매한 면이 있는데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정확히 나와있지만 그 윗대 선조에 대해서는 애매한 모습이라고 합니다. 확실한 점은 이 가문은 슈바벤 공작령의 지역에서 영향력 있는 가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는 뷔렌의 프리드리히와 그의 아내인 에기스하임의 힐데가르트의 자녀로 알려져있습니다. 프리드리히의 아버지인 뷔렌의 프리드리히는 아마도 백작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인물로 추정되며 이것은 프리드리히 1세가 슈바벤 공작이 되는 기반이 되었을 것입니다. 프리드리히의 어머니인 에기스하임의 힐데가르트 역시 가계가 정확히 알려져있지 않습니다만 에기스하임-다스부르크 백작의 딸로 추정되며, 이때문에 교황 레오 9세가 힐데가르트의 숙부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문장

 

슈바벤 공작이 되는 프리드리히는 이미 이전에 아버지처럼 백작 지위를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그는 가문 이름의 유래가 되는 슈타우펜 성(호엔슈타우펜 성)을 지었고 이것은 중세시대 그가 그 지역의 통치자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아마도 슈바벤 지역에서 어느정도 영향력있는 영주였을테지만 그리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그가 힘을 얻게 되는 것은 복잡한 제국내 정치 상황때문이었습니다.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교회와 갈등을 빚었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서 제국내에서는 하인리히 4세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새로 로마인의 왕을 선출했는데 그가 바로 슈바벤 공작이었던 라인펠덴의 루돌프였습니다. 루돌프는 사실 하인리히 4세의 누나인 마틸데의 남편이었을뿐만 아니라 마틸데가 죽은뒤 루돌프가 재혼한 상대는 하인리히 4세의 황후였던 사보이의 베르타의 자매였던 사보이의 아델하이트였습니다. 이런 관계로 그는 하인리히 4세와 가까운 사이였었지만 하인리히 4세가 파문당하자 그의 반대편에 서서 "대립국왕"으로 선출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하인리히 4세가 파문당했을때 독일쪽 영주들 대부분이 하인리히 4세에게서 등을 돌렸었습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황제를 지지하는 몇안되는 사람중 하나였었습니다.

 

라인펠덴의 루돌프의 씰

 

1078년 카놋사의 굴욕이후 하인리히 4세는 파문이 취소되고 황제로 복귀합니다. 그는 당연히 자신의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1079년 하인리히 4세는 상위군주로 라인펠덴의 루돌프의 슈바벤 공작령을 뺏았으며 이것을 자신의 충실한 지지자였던 프리드리히에게 줬으며 프리드리히는 호엔슈타우펜 가문 출신의 첫번째 슈바벤 공작이 됩니다. 게다가 하인리히 4세는 프리드리히와 자신의 딸인 바일블링겐의 아그네스를 결혼시키기까지 했습니다.

 

바일블링겐의 아그네스,하인리히 4세의딸, 프리드리히 1세의 부인

 

프리드리히 1세는 슈바벤 공작으로 임명되었지만 슈바벤 공작령을 쉽게 얻을수는 없었습니다.슈바벤 공작령의 계승을 주장하는 인물들인 라인펠델의 루돌프의 아들과 사위와 슈바벤 공작령을 두고 경쟁관계에 놓여있었습니다. 이런 경쟁관계는 결국 1098년 이전에 슈바벤 공작령의 상속을 주장했던 베르톨트 2세와 합의를 봐서 서로의 영지를 인정해주는 대신 프리드리히는 슈바벤 공작이 되고, 베르톨트 2세는 재링겐 공작이 되는 것으로 합의봤다고 합니다.

 

슈바벤 공작 베르톨트 1세, 후에 재링겐 공작

 

이흐 프리드리히 1세는 가문의 영지를 지속적으로 넓혀갔엇습니다. 프리드리히는 1105년 사망했지만 그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11명의 자녀가 있었으며 둘의 장남인 프리드리히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슈바벤 공작이 되었으며 로마인의 왕이 되고 싶어했지만 장인인 바이에른의 공작이 그가 아닌 로타르 3세를 지지했기에 황제가 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는 결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됩니다. 둘째 아들인 콘라트는 황제 로타르 3세가 죽은뒤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