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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통치 가문들..(66) 호엔슈타우펜 가문 : 황제의 가문이 되기까지

엘아라 2022. 9. 16.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뭐랄까 황제의 가문이라는 느낌이었는데 갑자기 확 성장한 가문이었네요.

 

유럽의 통치 가문들..(66) 호엔슈타우펜 가문 : 황제의 가문이 되기까지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1세가 사망하고 그의 뒤를 이어서 아들인 프리드리히 2세가 슈바벤 공작령을 상속받았습니다. 그의 동생인 콘라트와 프리드리히 2세는 외삼촌인 황제 하인리히 5세가 즉위하면서 힘을 얻게 됩니다. 아마도 하인리히 5세는 믿을 만한 사람들이 필요했을 것이며 조카들인 호엔슈타우펜 가문 사람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썼던 것입니다. 프리드리히 2세와 콘라트는 황제의 대리인으로 행정관으로 일을 했으며 이것을 통해서 가문의 영지를 확장해나가는데 힘을 보태게 됩니다. 아마도 이런 상황은 공작 프리드리히 2세가 벨프가문 출신의 바이에른 공작이었던 하인리히 9세의 딸인 유디트와 결혼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1세의 장례식을 묘사한 모습

 

1125년 황제 하인리히 5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황위계승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때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형제들이었던 프리드리히와 콘라트 둘다 황위계승후보중 한명이 됩니다. 그들은 이미 하인리히 5세 시절에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그들의 어머니인 바이블랑겐의 아그네스는 남성 후계자가 단절된 잘리어 가문의 상속녀였으며 이것은 이들에게 황위를 주장할수 있는 어느정도의 권리를 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슈플린부르크의 로타르가 등장합니다. 그는 주변의 제후들은 포섭하는데 성공하는데 이를테면 프리드리히 2세의 장인으로 강력한 제후중 한명이었던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9세에게 작센 공작령을 주기로 하면서 그를 포섭하기도 했습니다.

 

슈바벤의 공작 프리드리히 2세


프리드리히 2세는 처음에는 로타르가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되자 그를 국왕으로 인정했었습니다.하지만 곧 다시 한번 갈등을 일으키는데 이를테면 황실 재산과 잘리어 가문의 재산에 대해서 의견차가 있었고이것은 프리드리히 2세가 자신의 권리를 침해당하는 것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게다가 그는 여전히 지지하는 세력이 있었으며 이것은 그가 로타르를 거부할수 있을 것이라 여겼습니다.결국 프리드리히 2세는 로타르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게다가 성지 순례를 갔었던 동생 콘라트가 돌아오면서 더욱더 그에게 강력한 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동안 프리드리히 2세는 전투에서 한쪽눈을 잃기도 했습니다. 이후 투쟁은 프리드리히의 동생인 콘라트를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특히 1127년 콘라트는 몇몇 제국 도시들과 슈바벤 지역그리고 오스트리아 지역의 지지를 했고 이것을 통해서 콘라트는 로타르에 대항하는 anti"로마인의 왕"으로 즉위합니다.(당시 오스트리아의 통치자였던 레오폴트 3세는 콘라트의 새아버지로 콘라트의 어머니인 바이블링겐의 아그네스는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1세가 죽은뒤 오스트리아의 마르크그라프인 레오폴트 3세 와재혼했었습니다.)

 

하지만 로타르는 이들을 곧 평정하고 독일을 장악했으며 이후 이탈리아로 가서 황제로 즉위하게 됩니다.이때 프리드리히와 콘라트의 행동은 달라지는데 프리드리히 2세는 로타르를 인정했고 로타르 3세에게 용서를 구했다고 합니다만 콘라트는 지속적으로 로타르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1137년 로타르 3세가 죽자 콘라트는 다시 자신의 로마인의 왕 지위를 주장합니다.사실 콘라트는 이전에 계속해서 로마인의 왕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주장하고 있었으며국왕을 선출해야하는 독일의 제후들에게는 자신들에게 큰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면 그를 그대로 인정하는 편이 모두에게 편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호마인의 왕 콘라트 3세




이렇게 콘라트는 1137년 호엔슈타우펜 가문 출신의 첫번째 로마인의왕이 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