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이가문도 끝이군요.
이 가문 다음이 호엔슈타우펜인가?
유럽의 통치 가문들...(61) 잘리어 가문 : 첫번째 황제 콘라트 2세
잘리어 가문 출신으로 첫번째 황제가 되는 인물은 바로 콘라트 2세였습니다. 콘라트 2세는 황제 오토 1세의 외손자였던 카린시아의 공작 오토 1세의 손자였습니다. 황제 콘라트 2세는 어린시절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아버지인 슈파이어의 하인리히가 일찍 사망했으며 할아버지의 영지는 그가 아닌 숙부인 콘라트가 상속받았으며 아마도 이것은 그가 어린시절에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숙부가 일찍 죽고 카린시아 공작령을 뺏기고 난뒤에, 콘라트는 어린 사촌이었던 카린시아의 콘라트를 돌봐주게 되었다고 합니다.
콘라트는 아마도 가문에서 젊은 세대중 가장 나이든 인물이었으며 이것은 그가 가문을 이끌어가는 상황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결혼을 통해서 그의 권력을 잡을 기회를 마련합니다. 바로 숙모의 자매였던 슈바벤의 기젤라였습니다. 슈바벤 공작령은 공작 헤르만 3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계승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때 황제 하인리히 2세는 슈바벤 공작령을 자신의 측근이었던 바벤베르크의 에른스트 1세에게 줬었습니다. 그리고 공작령에 대한 상속문제를 강화하기 위해서 슈바벤 공작의 딸이자 과부였던 기젤라가 1012년경 에른스트 1세와 결혼했었습니다. 기젤라는 에른스트 1세와의 사이에서 두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1015년 에른스트 1세가 죽자 그의 미성년 아들인 에른스트 2세가 공작령을 이어받았고 기젤라는 섭정으로 슈바벤 공작령을 통치했습니다.
콘라트는 아마 이 기젤라와의 결혼이야말로 자신이 권력을 얻을 중요한 기회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기젤라는 아들의 섭정으로 슈바벤 공작령을 통치하고 있었는데 기젤라와 결혼한다면 기젤라의 남편이라는 권리를 통해서 슈바벤 지역을 통치할수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콘라트는 1017년 기젤라와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황제 하인리히 2세는 콘라트를 견제했으며 그가 슈바벤 지역을 장악할것을 우려해서 기젤라를 섭정 지위에서 배제시켰고 전 공작의 형제에게 섭정지위를 부여했었습니다. 이 결과 콘라트는 슈바벤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얻을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기젤라와 콘라트가 결혼한 것은 콘라트에게 매우 이익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기젤라는 매우 부유한 여성이었으며 기젤라는 샤를 마뉴의 후손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부와 명분은 역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오토 1세의 후손이기도 한 콘라트에게 큰 힘이 되는 것이기도 했었습니다. 이때문에 황제 하인리히 2세는 이들을 헤어지게 하려고 했고 그 근거로 둘이 모두 하인리히 데어 포글러의 후손임을 들어서 헤어지도록 강요했었습니다. 당시 교회법상 둘은 근친결혼에 해당되지 않았었지만 당대 성직자들은 이들에 대해서 근친결혼으로 봤었고 황제 역시 이를 빌미로 헤어질것을 강요했다고 합니다.결국 콘라트는 한동안 망명생활을 했어야했는데 이때 기젤라는 콘라트의 후계자가 될 아들인 하인리히를 낳았었습니다. 결국 콘라트와 하인리히 2세는 화해했고 콘라트는 다시 슈바벤으로 돌아갈수 있었습니다.
1024년 하인리히 2세가 후계자없이 사망하면서 황위계승자에 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인리히 2세의 황후였던 쿠니쿤데는 일단 섭정으로 권력을 장악했으며 이에 대해서 쿠니쿤데의 형제들인 메츠의 주교와 바이에른 공작등은 물론 마인츠의 대주교 역시 쿠니쿤데를 지지했었습니다. 곧 로마인의 왕을 뽑기 위해 귀족들이 왔으며 강력한 후보로 콘라트와 그의 사촌인 카린시아의 콘라트가 등장합니다. 둘다 오토 1세의 후손으로 황위계승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후보들도 있었지만 영주들은 이 둘을 가장 강력한 후보로 여겼는데 특히 콘라트에게는 아들이 있었으며 이것은 콘라트가 황제가 된다면 안정적으로 왕위가 이어질수 있다는 것이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결국 콘라트는 1024년 9월 8일 마인츠 대성당에서 로마인의 왕 콘라트 2세로 즉위했습니다. 하지만 마인츠 대주교는 콘라트의 아내인 기젤라에 대해서 근친결혼이기에 왕비로 대관하는 것을 거부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이전에 콘라트를 반대했던 쾰른의 대주교는 콘라트와 화해할 기회라고 여겼으며 그의 주도로 1024년 9월 21일 기젤라 역시 왕비로 대관하게 됩니다. 이 대관이후 기젤라에 대한 반대 의견 역시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콘라트 2세는 로마인의 왕이 되었지만 초기에 자신과 경쟁했던 사촌인 콘라트나 자신에게 반대했던 다른 영주들에 대해서 지지를 얻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의붓아들이었던 슈바벤 공작 에른스트 1세 역시 그의 통치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콘라트 2세는 이를 평정했습니다. 이후 이탈리아에서 제국의 통치를 반대하는 이들이 역시 봉기를 일으키자 이탈리아를 정복하기 위해서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1027년 3월 26일 로마에서 콘라트와 그의 아내인 기젤라는 황제와 황후로 대관합니다.
콘라트는 자신의 지위는 물론 아들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여러가지 일을 했었습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독일로 돌아와서 콘라트 2세는 자신의 아들인 하인리히를 공동통치자로 국왕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재산을 문서화하면서 이전까지 애매하게 남았던 재산을 모두 황제의 재산으로 편입했었습니다. 또 아들인 하인리히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자신을 반대했던 바이에른의 공작 하인리히 5세가 사망하자 상위군주로 바이에른 공작령에 대한 권리를 주장해서 공작령을 뺏아서 아들인 하인리히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늘 반항했던 의붓아들인 슈바벤 공작에게서 공작령을 뺏았고 결국 자신의 아들인 하인리히에게 주었습니다.
이런 콘라트의 행동은 영주들이 반발을 일으키는 것이었고 그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는 일이 점점 많아지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 콘라트는 매우 강력하게 진압했는데 이전의 오토 가문에서는 반란을 일으켜도 적당히 용서해주는 주의였다면 콘라트는 이들을 제국의 적으로 규정하고 이들의 영지를 뺏거나 압박을 가했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상황에서 콘라트는 영주들보다 성직자들을 요직에 앉히게 되는 것이었을듯합니다.
콘라트 2세가 통치하던 시기에 신성로마제국의 주변 국가들인 폴란드,보헤미아 헝가리등과도 복잡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신성로마제국의 경계를 두고 경쟁하던 관계였습니다. 보헤미아는 오토 3세 시절 신성로마제국의 한주가 되었지만 인근의 폴란드에 강력한 영향을 받았고 이때문에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갈등을 빚었습니다. 헝가리는 오토 3세의 승인으로 왕국이 되었고 헝가리는 이때는 신성로마제국과 우호관계였었습니다. 하지만 콘라트 2세 시절에는 이들 모두와 갈등관계가 됩니다. 먼저 폴란드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이에 보헤미아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폴란드와 보헤미아가 신성로마제국과 갈들을 빚자 헝가리 역시 신성로마제국과 갈등관계가 됩니다.
콘라트 2세는 또 부르고뉴 지역을 통합하게 됩니다. 부르고뉴의 국왕이었던 루돌프 3세가 후계자가 없자 자신을 후계자로 삼으라고 강요하게 됩니다. 하지만 루돌프는 이를 거부하고 다른 후계자를 찾았는데 결국 루돌프 3세와 콘라트는 만나서 문제를 합의합니다. 루돌프는 살아있는 동안 왕국의 통제권을 인정받았고 대신 후계자로 콘라트 2세를 결정하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루돌프 3세가 죽은뒤 잠시 반란이 있긴 했지만 콘라트 2세는 결국 부르고뉴를 평정했으며 이로써 독일지역과 이탈리아 부르고뉴 지역을 신성로마제국의 기본 지역으로 확립되게 됩니다.
콘라트 2세는 1039년 통풍으로 사망했습니다. 콘라트 2세가 죽은뒤 그의 아들인 하인리히는 아버지의 뒤를 이었으며 정식으로 "로마인의 왕"이 되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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