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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왕비들...(94)부르고뉴의 마르거리트 : 루이 10세의 왕비

엘아라 2022. 7. 7.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정신차려보니까 벌써 필리프 4세의 며느리들이군요 

음냐...내년쯤에는 다할수 있을것같네요 -0-;;;

메로빙거 가문부터 시작했더니...휴....

 

프랑스의 왕비들...(94)부르고뉴의 마르거리트 : 루이 10세의 왕비

 

부르고뉴의 마르거리트

프랑스의 왕비

나바라의 왕비

Margaret of Burgundy

 (French: Marguerite; 1290 – 30 April 1315)

마르거리트의 씰

 

스캔들로 더 유명한 부르고뉴의 마르거리트는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2세와 그의 아내인 프랑스의 아그네스의 둘째딸로 태어났습니다. 부르고뉴 공작 가문은 프랑스의 국왕 로베르 2세의 아들이자 앙리 1세의 동생인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로부터 출발한 가문이었습니다. 부르고뉴 공작령은 프랑스 왕국내에서 중요한 공작령중 하나였으며 공작 가문은 프랑스 왕가의 방계 가문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마르거리트의 아버지인 로베르 2세는 프랑스 국왕에게 매우 충성스러운 인물로, 필리프 3세는 숙부인 시칠리아의 카를로 1세가 "시칠리아의 저녁기도"사건이 일어난뒤 숙부를 도왔는데, 이때 시칠리아 섬과 아라곤에 대한 전쟁에 로베르 2세 역시 참가했었습니다. 필리프 3세는 동생의 남편인 로베르 2세를 매우 신임했고 로베르 2세 역시 처남의 신뢰에 충성을 다했었습니다.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2세의 씰

 

마르거리트의 어머니인 아그네스는 프랑스의 루이 9세와 그의 아내인 프로방스의 마르거리트의 딸이었습니다. 아그네스는 남편이 죽고 아들이 미성년이었던 동안 섭정으로 부르고뉴 공작령을 통치했었습니다.

 

프랑스의 아그네스의 씰

 

프랑스 왕가의 방계 가문 출신이자, 어머니가 프랑스 공주였기에 프랑스 왕가와 직접적 혈연관계가 있었으며 또한 아버지가 매우 충성스러운 인물이었기에 프랑스왕가에서는 마르거리트와 필리프 4세와 나바라의 여왕 후아나의 장남인 루이의 결혼을 고려하게 됩니다. 그리고 1300년부터 결혼협상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결혼이 결정되었으며 1305년 필리프 4세의 왕비인 나바라의 여왕 후아나가 사망한뒤 마르거리트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서 나바라의 국왕으로 선포된 루이와 결혼식을 올렸으며, 마르거리트는 결혼하자마자 나바라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혼 6년뒤인 1312년 딸인 잔을 낳게 됩니다.

 

프랑스 궁정에서의 마르거리트의 삶은 정확히 잘 알려져있지 않습니다. 마르거리트는 아마도 프랑스 궁정에서 가장 높은 지위의 여성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시할머니였던 브라반트의 마리가 있었습니다만, 마리는 필리프 4세의 계모로 궁정에서 영향력이 거의 없었으며 이때문에 나바라의 왕비이자 후계자의 아내인 마르거리트가 가장 높은 지위의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동서들과 잘 어울렸을 것인데 이때문에 동서들 역시 그녀와 함께 사건에 연루됩니다. 마르거리트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는 불행했다고 알려져있는데  루이와 마르거리트는 성격이 서로 맞지 않는 사이였는데 루이는 아내보다 궁정 테니스(현재 테니스의 전신) 치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도 알려져있을 정도였습니다.

 

프랑스의 루이 10세, 프랑스와 나바라의 국왕, 마르거리트의 남편

 

 

 

이런 상황은 마르거리트가 "투르 드 네슬(네슬 탑)"사건이라고 불리는 불륜사건에 연루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1313년경부터 시작합니다. 1313년 필리프 4세의 딸인 이사벨과 사위인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2세가 프랑스를 방문합니다. 그리고 이사벨은 오빠들과 올케언니들에게 수놓은 주머니를 선물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돌아간 이사벨은 자신이 올케언니들에게준 주머니를 노르만 기사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1314년 프랑스로 간 이사벨은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필리프 4세는 며느리들과 의심받는 기사들을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1314년 필리프 4세는 며느리들이 네슬 탑에서 기사들을 만나서 간통행위를 했다는 보고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필리프 4세는 첫째며느리인 마르거리트와 막내며느리인 블랑쉬를 가두었으며 둘의 상대로 여겨지는 기사들 역시 체포합니다. 결국 심문이 이루어졌으며 고문을 통해서 기사들이 마르거리트와 블랑쉬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자백을 받게됩니다. 

 

프랑스의 이사벨, 잉글랜드의 왕비, 마르거리트의 시누이

 

마르거리트와 블랑쉬는 간통혐의로 노르망디에 있는 성인 샤토 갈야르Château Gaillard 에 투옥당했습니다. 마르거리트의 불륜은 분명해보였지만 루이는 이혼하지 않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결혼을 무효로해줄 교황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황 클레멘스 5세는  1314년 4월에 사망했고 5월에 콘클라베가 열렸지만 교황을 뽑지 못했습니다. 이 콘클라베는 무려 2년이나 지속되었으며 1316년 8월이 되어서야 교황 요한 22세가 선출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314년 11월 필리프 4세가 사망했고 마르거리트의 남편인 루이는 프랑스의 국왕 루이 10세가 됩니다. 하지만 루이 10세는 이혼할 필요가 없었는데 1315년 4월 마르거리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기 때문입니다. 당대 기록을 통해서 마르거리트는 아마도 낯선 환경에서 감금당했고 좋지 못한 대접을 받았기에 병으로 인해서 사망했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마르거리트의 죽음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루이 10세가 재혼하기 위해서 아내를 살해했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그리고 후대의 많은 작가들은 루이 10세가 재혼하기 위해서 아내를 살해했다는 이야기들을 쓰게 되었으며 이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갇혀있는 마르거리트, 19세기 상상화

 

마르거리트의 외동딸인 잔은 사실 궁정에서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 됩니다. 어머니가 간통으로 체포당했기에 잔의 출생역시 의심받았었습니다. 하지만 루이 10세는 잔을 자신의 딸로 인정했었으며 유언장에서 딸의 상속문제에 대해서도 명확한 의견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궁정내 상황으로 미뤄봤을때, 잔이 불륜으로 태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어보인다고 합니다. 잔은 오래도록 궁정에서 애매한 지위로 남았었는데 결국 발루아 가문 출신의 필리프 6세가 즉위하면서 나바라의 왕위를 얻게 됩니다.

 

마르거리트의 딸, 잔, 나바라의 여왕 후아나 2세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