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프로방스의 마르거리트는 뭐랄까 너무 많이 쓴듯하네요. 기운이 빠진다는..ㅠ.ㅠ
그러고 보니 아라곤의 인판타 할때 이사벨 했는데 말입니다. ㅎㅎㅎ
프랑스의 왕비들...(91) 아라곤의 이사벨 : 필리프 3세의 왕비
아라곤의 이사벨
프랑스의 왕비
Isabella of Aragon
(ca. 1247 – 28 January 1271),
아라곤의 이사벨은 아라곤의 국왕 하이메 1세와 그의 아내인 헝가리의 비올란트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이사벨의 아버지인 하이메 1세는 아라곤의 국왕으로 아라곤의 영향력을 크게 확대한 인물이었습니다. 비록 프랑스 남부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긴했지만 카탈루냐 지방에 대한 프랑스의 간섭을 배제했었으며 또한 이베리아 반도의 재정복 사업을 통해서 마요르카등의 지역을 손에 넣었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재미난 것은 하이메 1세의 첫번째 아내는 루이 9세의 이모였던 카스티야의 레오노르였습니다. 둘은 친족결혼으로 교황으로부터 결혼을 인정받지 못해서 헤어졌었습니다.
이사벨의 어머니인 헝가리의 비올란트는 헝가리의 국왕 언드라시 2세와 그의 아내인 욜란다 드 코트니의 딸이었습니다. 헝가리의 국왕 언드라시 2세는 원래 메라니아의 게르트루트(필리프 2세의 두번째 부인인 메라니아의 아그네스의 언니)와 결혼했습니다만 정치적 문제로 게르트루트가 귀족들에게 살해당했고 그 뒤에 욜란다 드 코트니와 결혼한 것입니다. 욜란다의 외삼촌인 플랑드르의 앙리는 라틴 제국의 황제였으며 후에 외삼촌이 죽은뒤 욜란다의 아버지인 피에르 드 코트니가 라틴제국의 황제가 되기도 합니다. 언드라시 2세는 오래도록 십자군 전쟁에 참전했었고 이런 관계 때문에 욜란다가 헝가리의 왕비가 될수 있었을 것입니다.
헝가리의 비올란트는 매우 지적이며 재능이 있는 여성으로 남편인 하이메 1세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로 알려져있습니다. 비올란트는 남편과 함께 여러 조약을 체결하는데 관여하기도 했었습니다.
많은 중세 여성들처럼 이사벨의 출생날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만, 아버지인 하이메 1세가 1248년 1월에 유언장에서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언급하고 있기에 이사벨은 1247년 내지 1248년 초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하이메 1세는 유언장에서 새로 세운 산타 마리아 데 시에나 수도원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언급하면서 만약 태어날 아이가 아들이라면 성전 기사단에 가입하게 하고 딸이라면 수녀로 서원하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 서원은 이사벨이 태어난 뒤 파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왜냐면 이사벨이 결혼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이메 1세는 프랑스의 국왕 루이 9세와 1258년 코르베일 조약을 체결합니다. 이 조약에서 하이메 1세는 이전의 알비십자군전쟁으로 인해서 프랑스에 잃은 옥시탕과 랑그도크 지역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대신 바르셀로나 백작의 다른 영지에 대한 통치권을 프랑스로부터 승인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조약에 대한 보증으로 루이 9세의 둘째아들인 필리프와 하이메 1세의 딸인 이사벨의 결혼이 결정되었습니다. 1258년 필리프와 이사벨이 약혼했을때 필리프는 프랑스의 제1왕위계승자는 아니었습니다만 1260년 형인 루이가 죽었기에, 1262년 이사벨이 필리프와 결혼했을때는 필리프는 프랑스의 왕위계승자였습니다.
이사벨은 궁정에서 그리 영향력이 큰 인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시어머니인 프로방스의 마르거리트도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에 이사벨은 더욱더 그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남편과 평온한 결혼생활을 했을 것이며 결혼한지 2년후인 1264년부터 1270년까지 네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루이 9세는 제 8차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했고 아들들과 며느리 딸 사위등도 함께 갑니다. 이때 이사벨 역시 남편인 필리프와 함께 여기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1270년 군대에는 이질이 돌았으며 시아버지인 루이 9세가 이때 사망합니다. 시아버지가 죽자 남편인 필리프는 프랑스의 국왕 필리프 3세가 되었으며 이사벨은 왕비가 됩니다. 이들은 서둘러 프랑스로 돌아오는데 돌아오던중 이사벨은 강을 건너다가 말에서 낙마합니다. 이때 이사벨은 임신 육개월 정도였기에 상태가 나빴습니다. 낙마한 직후 아이를 조산했는데 아이는 곧 사망합니다. 그리고 이사벨 역시 상태가 좋지 않았으며 아이가 태어난 보름쯤후에 사망합니다.
필리프 3세는 이미 가족들을 많이 잃었습니다. 그와중에 임신한 아내가 아이를 조산하고 사망한 것은 그에게 더욱더 충격이었습니다.
이사벨은 필리프 3세와의 사이에서 네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중 첫째인 루이는 아버지의 계승자였지만, 12살 정도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둘째인 필리프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프랑스의 국왕 필리프 4세가 됩니다. 셋째인 로베르는 2살 정도로 사망했으며 막내인 샤를은 발루아 백작이 되었으며 샤를의 아들인 필리프는 발루가 가문 출신으로 프랑스의 첫번째 국왕이 되는 필리프 6세가 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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