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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왕비들...(93) 나바라의 후아나 1세 : 필리프 4세의 왕비

엘아라 2022. 6. 30.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나바라의 인판타들 할때 후아나 했으니 대충 써야겠습니다. =-=

 

프랑스의 왕비들...(93) 나바라의 후아나 1세 : 필리프 4세의 왕비

 

 

나바라의 후아나 1세(호아나 1세)

나바라의 여왕, 상파뉴의 여백작

프랑스의 왕비

Joan I 

(14 January 1273 – 31 March/2 April 1305)[

Joana

후아나 1세의 석상

 

 

프랑스 식으로는 잔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나바라의 후아나 1세(호아나 1세)는 1273년 나바라의 국왕 엔리케 1세와 그의 아내인 아르투아의 블랑쉬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나바라의 엔리케 1세는 나바라의 테오발도 1세의 아들로 원래 형인 테오발도 2세가 있었지만 1270년 테오발도 2세가 십자군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염병으로 사망하면서 왕위에 올랐었습니다. 엔리케 1세 시절 나바라의 경제가 발전하던 시기였습니다만 그는1274년 사망했습니다. 

후아나의 어머니인 블랑쉬는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의 딸로 로베르는 루이 9세의 동생이자 7차 십자군 전쟁에서 전사한 인물이었습니다. 블랑쉬와 엔리케 1세 사이에서는 원래 아들이 있었습니다만, 이 아들은 유모가 실수로 떨어뜨려서 사망했고 부부는 아이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후 다시 아이가 태어났지만 아이는 딸인 후아나였습니다. 

 

나바라의 엔리케 1세의 씰

 

후아나가 1살때 아버지인 엔리케 1세가 사망했으며 이때문에 나바라의 통치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여성 계승자밖에 없고 섭정마저 여성이었던 나바라를 이웃국가였던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노리게 됩니다. 블랑쉬는 어린 후아나를 지키기 위해서 강력한 동맹을 원했고,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가 나바라를 공격했을때 결국 딸을 데리고 프랑스로 가서 필리프 3세의 보호를 요청했으며 딸인 후아나를 프랑스의 왕위계승자와 나바라의 여왕인 딸을 결혼시키는 협정에 서명했습니다. 프랑스 왕가의 입장에서 볼때 상파뉴 여백작이나 나바라의 여왕인 후아나가 프랑스 왕위계승자와 결혼하는 것은 매우 큰 이익이었습니다. 특히 상파뉴 백작은 전통적으로 파리 인근의 강력한 영주였으며 경제적으로도 부유한 곳이었기에 상파뉴 백작령을 프랑스 왕가가 손에 넣는 것은 큰 이익이 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아르투아의 블랑쉬, 나바라의 왕비, 랭카스터 백작부인

 

후아나의 어머니는 딸의 결혼을 결정한 다음해에 재혼하게 됩니다. 이것은 아마 후아나가 미래의 프랑스 왕비로 프랑스 궁정에서 자라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후아나는 나바라의 여왕이었지만 나바라의 상황은 너무나 복잡했기에 아마도 나바라를 떠난 이후 나바라에 거의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자라난 후아나는 상파뉴는 좀더 가깝게 여겼을 것이지만 나바라는 거의 외국으로 느꼈을 가능성이 큽니다.

 

1284년 11살의 후아나는 당시 프랑스의 왕위계승자였던 16살의 필리프와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후아나는 프랑스에서 살면서 아마도 프랑스 식의 이름인 잔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썼을 듯합니다. 후아나가 결혼식을 올리면서 성인으로 선포되었으며 이제 후아나가 상파뉴와 나바라를 직접적으로 통치할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나바라에 대해서는 후아나의 시아버지인 필리프 3세가 보낸 프랑스 인 총독이 나바라를 통치하게 됩니다. 상파뉴에 대해서는 좀 더 복잡했는데 후아나의 어머니인 블랑쉬가 두번째 남편인 랭카스터 백작 에드먼드와 함께 상파뉴의 섭정으로 상파뉴를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후아나가 이제 성인이 되었으며 상파뉴의 통치 권리는 후아나와 그녀의 남편인 필리프에게 있었기에 블랑쉬와 에드먼드는 지위를 내놔야했었습니다.  이렇게 상파뉴의 통치 권리를 얻은 후아나는 자신의권리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성 조지와 함께 있는 랭카스터 백작 에드먼드, 후아나의 새아버지

 

그리고 1285년 후아나의 시아버지인 필리프 3세가 사망하고 남편인 필리프가 필리프 4세로 즉위하면서 후아나 역시 프랑스의 왕비가 됩니다. 

 

필리프 4세의 대관식

 

후아나는 프랑스 왕비로 매우 성공적인 왕비였습니다. 기본적으로 프랑스 궁정에서 후아나를 견제할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시할머니는 궁정에서 은퇴했었으며 시어머니는 궁정에서 힘이 없었을뿐만 아니라 필리프 4세의 계모였기에 더욱더 필리프 4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필리프 4세는 아내에게 심리적으로 매우 의존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후아나는 "조각상같았다"라고 알려진 남편 필리프 4세와는 달리 평범한 외모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심리적으로 후아나는 어려서부터 나바라의 여왕이자 상파뉴의 여백작으로 자신의 지위를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감이 넘쳐흘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후아나는 프랑스 궁정에서 영향력을 확장했을뿐만 아니라 자신의 프랑스 영지인 상파뉴 백작령의 통치에도 관여했었습니다.

 

후아나는 1305년 갑작스럽게 사망했습니다. 후아나가 죽기 3년전 후아나의 어머니인 블랑쉬가 사망했었는데 둘의 사망에 대해서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의심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아마 남편인 필리프 4세가 이를 가장 믿었을 듯합니다. 특히 1308년 트루아의 주교였던 기샤르가 마법으로 후아나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지만 1313년 석방됩니다. 사실 기샤르는 이전에 상파뉴 백작령에 대한 자금 문제로 인해서 후아나와 그녀의 어머니인 블랑쉬에게 고소를 당한적이 있었고 이때문에 그가 의심을 받았을 듯합니다.

 

후아나의 죽음

 

후아나는 남편인 필리프 4세와 매우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고 알려져있으며 여러 자녀들이 태어났습니다. 그중 세명의 아들인 루이,필리프,샤를은 모두 차례로 프랑스의 국왕이 되었으며 딸인 이자벨은 잉글랜드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필리프 4세와 동생인 발루아 백작 샤를 그리고 네명의 자녀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