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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왕비들...(92) 브라반트의 마리 : 필리프 3세의 왕비

엘아라 2022. 6. 23.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필리프 3세의 부인들은 그렇게 많이 이야기가 없네요 -0-;;;

그나저나 브라반트 공작가문 사람들은 독일어로 이름을 읽어야하나요 프랑스어로 읽어야하나요 아니면 네덜란드어로 읽어야하나요

진짜 이름 읽는 것이 고민이예요 =-=

 

 

프랑스의 왕비들...(92) 브라반트의 마리 : 필리프 3세의 왕비 

 

브라반트의 마리

프랑스의 왕비

Marie of Brabant 

(13 May 1254 – 12 January 1322)

 

브라반트의 마리는 브라반트 공작 하인리히 3세와 그의 아내인 부르고뉴의 아델라이드(알리스 또는 알레이디스)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브라반트 공작 하인리히 3세는 당시 외교적으로 줄타기를 잘했기에 브라반트 지역의 평화를 누릴수 있었습니다. 마리의 어머니인 부르고뉴의 아델라이드는 부르고뉴 공작 위그 4세의 딸로 남편이 일찍 죽은뒤 아들의 섭정으로 일을 했었는데 브라반트 귀족들은 처음에는 이를 수용하지 않는 이들이 많았다고 합니다만 결국 아델라이드는 섭정으로 권한을 행사하게 됩니다. 특히 아델라이드는 장남인 하인리히를 물러나게하고 차남인 요한을 브라반트 공작으로 세우기까지 했었습니다. 

 

브라반트 공작 하인리히 3세와 그의 가족들,

 

마리는 아버지가 죽었을때 겨우 6살이었으며 브라반트 공작의 궁정에서 평온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20살이 되던 1274년 프랑스의 국왕 필리프 3세의 두번째 부인이 됩니다. 아마 마리가 필리프 3세와 결혼한 것은 마리의 오빠였던 요한과 프랑스 왕가의 사이가 좋았던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마리아 오빠인 브라반트 공작 요한은 매우 뛰어난 군인이자 당대 기사도 이야기의 전형적인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행동은 전설처럼 사람들에게 이야기되었습니다. 이런 요한에 대해서 당연히 프랑스 왕가에서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길 원했고 루이 9세의 딸이자 필리프 3세의 여동생인 마르거리트를 요한과 결혼시켰습니다. 하지만 마르거리트는 1271년 아이를 낳다가 사망했습니다.

아마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왕가는 브라반트 공작 가문과 다시 한번 연결고리를 원했을 것이며 결국 요한의 여동생인 마리가 필리프 3세와 결혼하게 된것입니다. 

 

전쟁에 나서는 브라반트 공작 요한

 

마리가 결혼했을때 필리프 3세에게는 이미 아들이 셋이나 있는 홀아비였습니다. 이것은 마리가 프랑스 궁정에서 그리 입지가 크지 않았을 원인중 하나가 됩니다. 게다가 필리프 3세의 어머니였던 프로방스의 마르거리트는 자신의 시어머니처럼 궁정에서의 권력을 놓지 않았으며, 마치 자신의 시어머니인 블랑쉬처럼 며느리에 대해서 압박을 가했었습니다. 특히 1276년 필리프 3세의 장남인 루이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사람들은 루이가 독살당했다는 의심을 합니다. 그리고 마리는 바로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데 왜냐면 1276년 마리는 아들인 루이를 낳았기에 자기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서 전처자식을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특히 필리프 3세의 어머니인 마르거리트와 마르거리트의 지지를 받던 인물이 대놓고 의심했기에 마리의 위치는 더욱더 난처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독살에 가담했다고 의심받은 인물은 바로 사형에 처해지기까지 했었습니다. 

 

필리프 3세와 브라반트의 마리의 결혼식

 

마리는 궁정에서 숨죽여 살아야했을 것입니다만 필리프 3세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으며 이것은 남편에게 어느정도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는 원인이 됩니다. 특히 1282년 "시칠리아의 저녁기도" 사건이 일어나자  마리는 시숙부였던 시칠리아의 카를로 1세와 함께 시칠리아 문제에 개입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어쩌면 마리가 시칠리아의 카를로 1세를 지지했던 것은 시어머니인 마르거리트가 카를로 1세를 대놓고 견제했던 것과 연결될수 있을 듯합니다. 결국 이것은 필리프 3세가 아라곤과 전쟁을 하는 계기가 됩니다만, 결국 필리프 3세는 1285년 전쟁중 이질로 사망했습니다. 

 

남편이 죽고 의붓아들인 필리프 4세가 즉위하면서 마리의 궁정에서의 영향력은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이때 마리의 시어머니인 마르거리트 역시 아들이 죽은뒤 궁정에서 은퇴했었는데, 이것은 필리프 4세의 아내이자 나바라의 여왕이었던 잔(후아나)가 왕비가 되는 것과 연결이 될듯합니다. 남편과 결혼할때 이미 나바라의 여왕이자 상파뉴의 여백작으로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을뿐만 아니라 남편에게 엄청나게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알려진 잔의 존재는 시할머니나 시어머니가 궁정에서 남을수 없게 만들었을 듯합니다. 

 

브라반트의 마리와 며느리인 나바라의 후아나 1세, 입고있는 문장으로 봐서 오른쪽이 마리입니다.

 

마리는 과부가 된 뒤 세 자녀들인 루이,블랑쉬,마르거리트를 키우고 이들을 위해서 살게 됩니다. 하지만 마리는 자녀들보다 오래 살았습니다. 물론 정치적 영향력은 거의 없었지만 후손들의 일에 관여했는데 이를테면 손자인 필리프 데브뢰가 루이 10세의 딸인 잔과 결혼하게 되었을때 어린 잔은 한동안 의붓할머니인 마리와 함께 살기도 했었습니다.  1322년 마리가 사망한뒤 마리는 왕실 묘지인 생드니에 묻히지 않았고 파리에 있는 수녀원에 묻혔습니다.

 

마리의 세자녀중 아들인 샤를은 에브뢰 백작이 되는데 샤를의 아들이자 마리의 손자였던 필리프 데브뢰는 루이 10세의 딸인 잔과 결혼했고 잔이 후에 나바라의 여왕 후아나 2세가 되면서 필리프 데브뢰도 나바라의 국왕이 됩니다. 

마리의 딸인 블랑쉬는 오스트리아 공작인 루돌프와 결혼했습니다. 루돌프는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로마인의 왕이었던 루돌프 1세의 손자이자 역시 로마인의 왕이었던 알브레히트 1세의 아들이었습니다.

또 다른 딸인 마르거리트는 잉글랜드의 국왕 에드워드 1세의 두번재 아내가 되었습니다. 마거릿의 손녀였던 켄트의 조앤은 후에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흑태자 에드워드와 결혼해서 리처드 3세의 어머니가 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