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아라곤 왕국은 후안 1세의 동생인 마르틴이 왕위를 잇지만 그의 후계자는 일찍 죽고 결국 후계자가 단절됩니다. 그런데 사실 시칠리아 왕국이 먼저 후계자가 단절되어서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가 아라곤 국왕에게 넘어가는 과정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걸 할려니 시기가 애매해서 일단 아라곤의 왕위계승문제를 먼저할까합니다. 어차피 카스티야 왕가 출신인 페르난도 1세의 딸들은 카스티야의 인판타로 알려져있고, 페르난도 2세가 결혼하기 전까지 인판타는 후안 2세의 딸들인데 후안 2세의 첫번째 아내딸들은 나바라의 인판타들에서 다 했으니까. 두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만 하면 될것같습니다. 결국 아라곤 왕국 계승문제하고 후안 2세 딸하고 바로 시칠리아 왕국으로 넘어갈까합니다.
..그리고나서는 공포의 카스티야 왕가..ㅠ.ㅠ
아라곤의 인판타들...번외편 아라곤 왕국의 계승문제
1410년 아라곤의 국왕이었던 마르틴이 갑작스럽게 사망합니다. 그는 첫번째 결혼에서 아들을 뒀었지만 그 아들은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두번째 결혼에서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르틴은 죽기전 후계자를 지목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아라곤 왕국의 왕위계승을 두고 다툼을 하는 원인이 됩니다.
마르틴이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고 죽게 되면서 아라곤 왕위 계승에 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기본적으로 아라곤은 여성의 상속을 인정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페트로닐라였습니다. 하지만 여성과 남성 후계자의 계승순위는 애매했는데 이를테면 마르틴은 형의 딸들이 있었음에도 남성 후손이 우선 상속권을 가진다고 주장했고 이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왕위를 잇게 된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정당성을 가진 사람은 사실 우르겔 백작 하이메 2세였습니다. 그는 아라곤 왕가의 남성 후손들중 마르틴과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습니다. 하지만 왕위계승은 단순히 명분만 중요하지는 않았으며 복잡한 정치적 문제가 개입되는 것이었습니다.
마르틴이 죽고 나서 왕위계승후보자로 여겨진 사람은 여섯사람 정도였습니다.
첫번째는 우르겔 백작이었던 하이메 2세였습니다. 하이메 2세는 아라곤의 국왕 알폰소 4세(마르틴의 할아버지)의 증손자였습니다. 그는 남성후계자로 마르틴과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으며 게다가 마르틴의 누이였던 이사벨의 남편이기도 했기에 왕위계승권리를 강하게 주장할수 있었습니다.
두번째는 앙주의 루이로 후에 앙주 공작 루이 3세였습니다. 그는 마르틴의 조카이자 후안 1세의 딸이었던 욜란다의 장남이었습니다. 욜란다가 비록 남성인 숙부에게 왕위계승권리가 밀렸지만, 남성 직계가 단절된 상황에서 여성 계승자를 통해서는 왕위계승권리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기도 했었습니다.
세번째와 네번째는 간디아 공작 알폰소 1세와 그의 동생인 리바고르사의 후안이었습니다. 둘의 경우 형제 상속(마르틴이 형의 딸들을 대신해서 상속받은 권리)과 남성위주의 장자상속제를 생각했을때 가장 가까운 왕위계승자이기도 했었습니다.
다섯번째는 카스티야의 페르난도로 페드로 4세의 외손자이자 마르틴의 조카로 죽은 국왕가 가장 가까운 남성친척이라는 근거로 왕위계승권리를 주장합니다.
그리고 마자믹은 루나백작인 프레드리크였습니다. 그는 마르틴의 아들인 시칠리아의 마르틴 1세의 사생아 아들이었습니다. 이때문에 마르틴의 손자이기도 했기에 마르틴의 남성 직계후손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생아였기에 계승권리가 애매했는데 마르틴은 자신의 손자가 왕위를 잇길 바랬기에 교황으로부터 그의 적자 지위를 인정받게 했고, 신분상 그는 적자였기에 상속권리가 있었습니다.
이들 여섯 인물들중 정통성에서나 세력면에서나 가장 강력한 후보는 우르겔 백작이었던 하이메 2세였습니다. 하지만 카스티야의 인판테였던 페르난도는 카스티야의 섭정으로 일했을뿐만 아니라 카스티야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이기에 카스티야 세력을 등에 업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또 정통성으로는 앙주의 루이 역시 하이메 2세 못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는 프랑스 왕가를 등에 업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당연히 아라곤의 왕위를 서로 양보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결국 코르테스를 열어서 코르테스 구성원들이 결정하기로 합의를 봅니다.
문제는 코르테스 내에서의 문제 역시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카탈루냐,아라곤,발렌시아는 각자의 속셈이 있었으며 이것은 이들이 지지하는 인물을 다르게 했으며 왕위계승후보자들간의 갈등은 물론 코르테스내의 갈등마저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우르겔 백작의 지지자가 앙주의 루이의 지지자였던 인물을 암살해버리는 사건이 일어났었습니다. 이것은 카스티야의 페르난도에 대한 지지를 더 올리는 결과를 낳았는데, 페르난도는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 카스티야군을 이끌고 아라곤과 발렌시아로 가서 우르겔 백작을 지지하는 인물들을 정리하기도 했습니다.
갈등이 심해지면서 왕위계승자를 선택하지 못하자 교황 베네딕토 13세는 중재안을 제안했습니다. 카탈루냐, 아라곤, 발렌시아 세곳에서 세명씩 대표를 뽑아서 소규모 대표의원들이 투표를 해서 왕위계승자를 뽑자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당연히 이에 대해서 반발하는 인물들 역시 존재합니다만, 이미 2년간이나 국왕을 뽑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선거에서 카스티야의 페르난도가 아라곤의 국왕으로 선출됩니다. 그리고 1412년 6월 28일 카스티야의 페르난도는 공식적으로 아라곤의 국왕으로 선포됩니다.
우르겔의 하이메 2세는 처음에는 선거 결과에 수긍해서 페르난도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만 결국 1413년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리고 우르겔 백작을 지지하는 많은 귀족들이 여기에 가담합니다. 하지만 결국 페르난도가 승리를 거두면서 페르난도가 확고하게 아라곤의 국왕이 됩니다. 그리고 그의 손자인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는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가 결혼했으며 이것이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차지하는 에스파냐가 생기게 되는 시작이 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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