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세개로 끝냈습니다만 글이 엄청 길어졌습니다.
날로 먹는 글들 한 대여섯개 분량인듯해요 --;;;;
아라곤의 인판타들...(32)아라곤의 욜란다 : 후안 1세의 딸(세번째)
아라곤의 욜란다
앙주 공작부인
Yolande of Aragon
(11 August 1384 – 14 November 1442)
욜란다는 사윗감과 자녀들을 데리고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영지로 가서 있었습니다만 당시 프랑스의 상황은 매우 복잡해지고 있었습니다. 부르고뉴 파와 아르마냑 파의 갈등이 치열해지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 잉글랜드의 헨리 5세가 침공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프랑스쪽에서는 위기감을 느꼈으며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 파 모두가 위기를 느끼고 고 있었고 잠시 둘의 갈등을 접고 잉글랜드에 대항하려하는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아쟁쿠르 전투였는데 부르고뉴 공작은 이 전투에 관여하지 않으려했지만 공작의 동생이나 친척들은 프랑스 측으로 적극적으로 참전했으며 공작 역시 말리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이 전투는 잉글랜드의 대승으로 끝났으며 아마 이것은 더욱더 프랑스의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정치정 상황은 더 복잡해졌는데 1415년 샤를의 큰형이었던 루이가 사망했고, 1417년에는 샤를의 둘째형이었던 장이 사망합니다. 이렇게 되자 국왕 샤를 6세의 후계자가 될 아들은 샤를 밖에 남지 않게 되고 그는 후계자인 도팽이 됩니다. 그런데 이전에 루이나 장 모두가 어느정도 부르고뉴 파와 연결고리가 있었다면 샤를은 미래 장모였던 욜란다에 영향을 받았으며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아르마냑 파였기에 좀 상황이 묘하게 됩니다. 게다가 아르마냑 파 대부분이 아쟁쿠르 전투 이후 전사하거나 잉글랜드의 포로가 되었기에 피해가 없었던 부르고뉴 공작이 권력을 갖는 손쉬운 일이기도 했었습니다.
결국 잉글랜드라는 외적에 대항하기 위해서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는 서로 만나기로 했는데 부르고뉴 파의 대표였던 부르고뉴 공작 장 상 푀르와 아르마냑파의 대표였던 도팽 샤를이 만나기로 결정했는데 이 만남은 협상을 위한 것으로 비무장으로 만나기로 했었습니다. 하지만 샤를의 기사들중 일부가 개인적 보복을 한다는 이유로 부르고뉴 공작을 살해했으며 이것은 결국 부르고뉴 파와 아르마냑 파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부르고뉴 공작에게 포로로 잡혀있던 샤를 6세와 이자보 왕비가 샤를의 왕위계승권리를 박탈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트루아 조약이후 샤를은 부모에 의해서 왕위계승권리를 박탈당했기에 정통성을 의심받았으며 또 아르마냑 파 역시 잉글랜드의 세력에 밀려서 위축되어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르마냑 파의 강력한 지지자이며 딸의 약혼자로 미래의 사위인 샤를이 왕위계승권리를 뺏긴 것을 욜란다는 두고만 볼수 없었습니다. 1417년 남편인 루이가 사망했었지만, 욜란다는 오래도록 나폴리 왕위를 위해 싸웠던 남편을 도왔던 경험이 있었으며 이때문에 사위를 돕게 됩니다. 아마 샤를의 상황은 너무나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곁에는 자신을 응원하는 욜란다가 있었으며 이것은 그에게 큰 도움과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욜란다는 잔 다르크가 나타난 초기부터 잔 다르크를 강력하게 지지했었습니다. 잔 다르크가 샤를 7세와 프랑스를 구했다는 점에서 보면 이것은 욜란다의 정치적 안목이 탁월했다는 것을 알수 있을 것입니다. 욜란다는 사위인 샤를이 국왕 샤를 7세로 즉위 한뒤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샤를 7세는 자신에게 엄청나게 도움이 되었으며 또 자신에게 엄청나게 영향력을 행사했었던 장모인 욜란다를 함부로 대할수 없었습니다. 이때문에 이를테면 욜란다가 자신이 있는 곳에 주교지위에 대해서 자신이 원하는 인물이 아닌 샤를 7세가 다른 인물을 선택하는 것을 거부한다고 대놓고 밝히자 샤를 7세는 자신의 뜻을 철회하고 욜란다의 뜻을 따랐었다고 합니다.
욜란다는 매우 아름다운 여성으로 기록되어있는데 당대 기독교 공주들중 제일 아름다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외손자인 루이 11세는 외할머니에 대해서 여성의 몸에 남성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표현했었습니다. 아마도 욜란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남편과 아들 사위가 왕위계승을 주장하면서 투쟁하는데 적극적으로 도왔던 여성인것을 분명해보입니다. 욜란다는 손녀이자 후에 잉글랜드의 왕비가 되는 앙주의 마거릿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욜란다는 1442년 소뮈르에서 사망했습니다.
욜란다는 남편인 앙주 공작 루이 2세와의 사이에서 적어도 다섯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첫째는 아들인 루이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앙주 공작 루이 3세가 되었지만 성인이 되기전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둘째는 마리로 그녀는 후에 프랑스의 국왕인 샤를 7세와 결혼해서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셋째는 아들인 르네로 형의 뒤를 이어서 앙주 공작이 되었으며 이후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명목상의 지위, 특히 나폴리 왕위와 아내의 영지인 로렌 공작령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평생 했었습니다. 르네의 딸이 바로 헨리 6세의 왕비였던 앙주의 마거릿입니다. 넷째는 욜랑드로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1세와 결혼해서 브르타뉴 공작부인이 되었습니다. 막내는 멘 백작 샤를로 그의 아내가 바로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이모였기에 앙주의 마거릿이 우드빌 가문을 궁정으로 불러들이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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