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어째 두개로 끝날것같지 않군요 엉엉엉...
아라곤의 인판타들...(31) 아라곤의 욜란다 : 후안 1세의 딸(두번째)
아라곤의 욜란다
앙주 공작부인
Yolande of Aragon
(11 August 1384 – 14 November 1442)
나폴리 국왕과 왕비로써의 루이 2세와 욜란다의 씰
욜란다는 수많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앙주 공작의 부인이라는 지위를 제외하고는 다 명목상 지위였습니다. 특히 욜란다의 남편인 앙주 공작 루이 2세는 나폴리 국왕 타이틀을 다시 찾으려 노력하고 있었으며 아마도 욜란다도 그런 남편을 지지했고 남편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욜란다는 남편의 권리가 아닌 지산의 권리로 왕위를 얻을 기회를 다시 찾게 됩니다. 바로 숙부였던 아라곤의 국왕 마르틴이 1410년 후계자 없이 사망한 것이었습니다. 마르틴에게는 아들이 있었지만 이 아들은 후계자 없이 아버지보다 미리 사망했으며 결국 마르틴 역시 후계자 없이 사망합니다. 이렇게 되자 아라곤의 왕위를 두고 다시 갈등 양상이 벌어지게 됩니다. 욜란다는 마르틴의 형이자 선왕이었던 후안 1세의 딸이었고 여성 왕위계승권리가 인정되던 이베리아 반도에서 당연히 높은 왕위계승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욜란다의 언니였던 후아나는 이미 사망한 뒤였기에 더욱더 왕위계승권리에 가까웠습니다. 게다가 욜란다가 아라곤의 왕위를 얻는 것은 남편인 루이 2세에게도 매우 좋은 일이었는데 마르틴은 죽을때 시칠리아의 국왕 지위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은 욜란다가 아라곤의 왕위를 얻으면 루이 2세가 아라곤은 물론 시칠리아의 국왕이 되기에 그의 나폴리 왕위를 되찾는데도 영향을 줄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욜란다 외에도 왕위계승을 원하는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고모인 레오노르의 아들인 카스티야의 인판테 페르난도였습니다. 후안 1세의 딸인 욜란다와 그녀의 아들인 루이 그리고 페드로 4세의 딸인 레오노르의 아들인 페르난도가 왕위를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2년동안 누가 아라곤의 국왕이 될지를 두고 다투었었는데 결국 1412년 카스티야의 인판테였던 페르난도가 아라곤의 페르난도 1세로 즉위하면서 끝나게 됩니다.
물론 욜란다는 정식으로 아라곤의 왕위를 얻지는 못했지만 스스로가 페르난도 1세보다 더 강력한 왕위계승권리를 가지고 있아고 여겼으며 스스로를 아라곤의 여왕이라고 칭했었습니다. 그리고 이전의 명목상 지위들을 더해서 "네 왕국의 Queen"이라고 불렀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명칭은 전부 명목상 명칭이었으며 이를 얻기 위해서는 군사적 투쟁이 필요했었습니다.
사실 욜란다나 그녀의 남편인 루이가 프랑스 왕가 출신으로 강력한 프랑스가 이들을 밀어준다면 나폴리나 아라곤에서 어느정도 승산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는 잉글랜드와 100년 전쟁중이었으며 게다가 프랑스 내부적으로 부르고뉴 파와 아르마냑파의 투쟁이 격렬했기에 외부적 도움을 줄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욜란다의 남편인 루이 2세는 샤를 6세의 사촌이자 앙주 공작으로 프랑스내에서 무시할수 없는 세력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역시 부르고뉴 파와 아르마냑 파 사이에서 선택해야했는데 욜란다는 아르마냑파를 선택하게 됩니다. 사실 욜란다의 남편인 루이 2세는 나폴리 왕위를 되찾기 위해서 대부분 집을 떠나있었으며 내정은 모두 아내인 욜란다에게 맡긴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욜란다는 아마도 남편을 대신해서 남편과 자신의 아이들에게 최선의 방법을 택했었으며 그것이 바로 아르마냑파를 지지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1413년 파리의 폭동이후 욜란다는 완전히 아르마냑파측에 섰는데 자신의 아들인 루이와 부르고뉴 공작의 딸이었던 카트린과의 약혼을 깨버린것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욜란다는 더 나아가서 왕비였던 바이에른의 이자보를 만나서 이자보의 막내아들인 샤를과 자신의 딸인 마리의 약혼을 주선합니다. 아마 부르고뉴 공작이 파리에 오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자보는 아르마냑파와의 우호 관계를 확보해야했기에 이런 제안을 받아들였던듯합니다.
이자보의 아들들중 살아남은 세 아들은 루이,요한, 샤를밖에 없었는데 이자보는 후계자가 될 루이를 매우 아꼈으며 장남와의 관계가 좋았었습니다. 요한은 일짜감치 바이에른 공작의 딸이자 부르고뉴 공작의 조카로 에노의 상속녀였던 자클린과 약혼했고 자신의 영지가 될 에노에서 성장했었습니다. 막내아들인 샤를은 어머니 곁에 있었지만 욜란다의 딸인 마리와 약혼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됩니다. 아르마냑 파와 부르고뉴 파가 치열하게 대립중이었으며 부르고뉴 파가 강성해지자 욜란다는 자녀들은 물론 사윗감인 샤를을 데리고 피신했었습니다. 이것은 딸과 샤를이 어려서부터 함께 지내면서 서로 익숙해지길 바랬었던것이 가장 컸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치적 상황이 복잡해지면서 욜란다는 점차 더 샤를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 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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