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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곤의 인판타들...(30) 아라곤의 욜란다 : 후안 1세의 딸(첫번째)

엘아라 2021. 12. 21.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내용 긴 사람 싫은데 말입니다. ㅠ.ㅠ

하지만 올해 두개를 써야 끝나기 때문에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아라곤의 인판타들...(30) 아라곤의 욜란다 : 후안 1세의 딸(첫번째)

 

아라곤의 욜란다

앙주 공작부인

Yolande of Aragon 

(11 August 1384 – 14 November 1442)

 

아라곤의 욜란다는 아라곤의 국왕 후안 1세와 그의 두번째 아내인 바의 비올란테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후안 1세는 첫번째 아내가 죽은뒤 재혼해야했는데 후안 1세의 아버지인 페드로 4세는 아들이 시칠리아 왕국의 공주와 결혼하길 바랬었지만 아버지와 사이가 나빴던 후안은 비올란테를 두번째 아내로 선택했었다고 합니다. 

바의 비올란테는 바의 공작이었던 로베르 1세와 그의 아내인 마리 드 발루아의딸로 태어났습니다. 로베르 1세는 바 백작으로 프랑스의 국왕 장 2세의 딸이었던 마리 드 발루아와 결혼하면서 바 공작이 되었습니다. 욜란다의 부모인 후안 1세와 비올란테는 가정적으로 행복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비올란테는 후안의 전처였던 아르마냑의 마르타와는 다른 성격으로 마르타가 시아버지는 물론 남편이 싫어했던 남편의 계모인 시빌라 데 포르티아와도 잘 지냈던 반면 비올란테는 남편처럼 시빌라 데 포르티아를 싫어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궁정내 갈등으로 이어졌는데 두 여성을 잘 지내지 못했고 마찰을 빚었는데 결국 후안 1세의 아버지인 페드로 4세가 죽고 후안 1세가 즉위하고 비올란테가 왕비가 되고 시빌라가 궁정에서 추방되면서 일이 해결됩니다. 

 

후안 1세와 비올란테의 무덤 조상

 

욜란다의 어머니인 비올란테는 남편인 후안 1세를 대신해서 국정에 관여했었는데 이것은 후안 1세가 자신이 골치아파하던 정치적 문제를 비올란테에게 처리하게 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은 비올란테가 남편이 죽은뒤 자신의 딸인 욜란다가 왕위를 얻게 하려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욜란다의 아버지인 후안 1세는 남성후계자 없이 사망합니다. 이에 아라곤 왕위를 얻기 위해서 주변 친척들이 기회를 노리게 됩니다. 특히 이미 후안 1세와 비올란테는 후안의 동생인 마르틴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으려는 시도를 했었기에 후안 1세가 사망한 직후 마르틴이 시칠리 섬에서 잠시 있는 동안 비올란테는 자신이 딸인 욜란다를 왕위에 올릴려고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명분이 매우 부족했는데 욜란다에게는 언니인 후아나가 있었기에 후안 1세의 딸로 왕위를 주장하려했어도 언니인 후아나보다 명분이 약했었습니다. 결국 왕위는 마르틴에게 돌아갔으며 마르틴은 자신의 경쟁자들 모두를 물리치고 왕위를 굳건히 했었습니다.

 

아라곤의 마르틴의 대관식

 

비록 정치적으로 복잡한 상황이었지만 욜란다는 결국 미혼의 왕족이었으며 이것은 충분히 외교적으로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욜란다에게는 이미 오가던 혼담이 있었습니다. 바로 앙주 공작으로 나폴리 국왕이 된 루이 2세였습니다. 나폴리 왕국은 원래 있던 시칠리아 왕국의 일부였습니다만,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교황과 대립하면서 결국 교황은 호엔슈타우펜 가문에게서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를 뺏았고 그 왕위를 프랑스의 국왕 루이 8세의 아들인 앙주 공작 샤를에게 줘버립니다. 그리고 샤를은 무력으로 시칠리아 왕국을 장악해서 시칠리아의 국왕 카를로 1세가 됩니다. 하지만 곧 시칠리아 왕국은 카를로 1세와 호엔슈타우펜 가문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나뉘었으며 특히 이탈리아 본토와 시칠리아 섬 두개로 나뉘었으며 시칠리아 섬 사람들은 앙주 가문의  통치를 거부했으며 차라리 호엔슈타우펜 가문 출신으로 아라곤으로 시집간 콘스탄차와 그녀의 남편인 아라곤의 페드로 3세를 국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시칠리아 왕국은 시칠리아 섬을 중심으로 하는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를 중심으로하는 나폴리 왕국 두개로 나뉘었습니다.당연히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은 서로 미묘한 갈등관계가 있었으며, 당연히 본가인 아라곤 왕가 역시 여기에 개입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나폴리 왕국의 왕위계승문제가 복잡한 양상으로 발전합니다. 특히 조반나 1세가 나폴리의 여왕이 되고 그녀가 죽을때 후계자가 없으면서 문제가 커지게 됩니다. 조반나 1세는 앙주-나폴리의 다른 친척들이 있었음에도 이들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서 왕위를 프랑스의 장2세의 아들이자 앙주 공작이었던 루이 1세를 양자로 삼아서 자신의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습니다. 그녀의 가문 역시 프랑스의 앙주 공작 가문 출신이었기에 당대 앙주 공작이었던 루이 1세를 입양하려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연히 다른 친척들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고 이것은 나폴리 왕국의 복잡한 왕위계승문제로 이어지게 됩니다.

 

앙주 공작 루이 1세, 욜란다의 시아버지

 

1389년 프랑스와 교황의 도움으로 앙주 공작 루이 1세의 아들인 앙주 공작 루이 2세가 나폴리의 국왕이 됩니다. 당연히 반발하는 세력이 많았는데, 루이 2세의 어머니였던 블루아의 마리는 아들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여러 외교적 노력을 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아라곤과의 결혼동맹이었습니다. 나폴리 왕국이 혼란해지면 당연히 옛 시칠리아 왕국의 계승권리를 주장하는 아라곤이 끼어들 여지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이에 블루아의 마리는 아들과 아라곤의 인판타였던 욜란다와의 혼담을 추진하게 됩니다. 당연히 이 혼담은 복잡한 양상으로 발전했는데 프랑스쪽에서는 당연히 이 혼담을 지지했었는데 이를테면 잉글랜드의 리처드 2세가 욜란다와의 혼담을 추진하자, 리처드 2세에게 샤를 6세의 딸인 이사벨을 신붓감으로 추전해서 결국 잉글랜드와 프랑스간의 혼담을 성사시키기도 합니다. 욜란다의 아버지인 후안 1세가 죽으면서 상황은 좀더 복잡해질수 있었습니다만, 블루아의 마리는 한결같이 욜란다와 아들을 결혼시키길 원했으며 욜란다의 숙부이자 이제 아라곤의 국왕이 된 마르틴을 설득시켰습니다. 결국 1400년 욜란다는 앙주 공작 루이 2세와 결혼식을 하게 됩니다. 욜란다는 결혼후 나폴리 왕비로 선포되었지만 사실 그녀는 실질적인 나폴리 왕비는 아니었습니다. 왜냐면 결혼 전해인 1399년 루이 2세는 경쟁자였던 라디슬라우에게 나폴리왕위를 내주고 나폴리에서 쫓겨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욜란다와 루이의 결혼식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