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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곤의 인판타들...(33) 아라곤의 마리아 : 페르난도 1세의 딸(첫번째)

엘아라 2022. 3. 1.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페르난도 1세의 딸들은 카스티야의 인판타로 넣을려고 했는데 보니까 아버지가 국왕이 된뒤에 시집갔더라구요.

그러니까 일단 아라곤의 인판타로 넣는것이 낫을듯해서 그냥 아라곤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아 그런데 이 집안 족보가....ㅠ.ㅠ 진짜 이베리아 반도쪽은 결혼할때 교황의 사면장이 필수라고 하는 이유가 있는듯하네요 =-=

 

아라곤의 인판타들...(33) 아라곤의 마리아 : 페르난도 1세의 딸(첫번째)

 

 

아라곤의 마리아

카스티야의 왕비

Maria of Aragon 

(24 February 1403–18 February 1445)

마리아의 문장

 

아라곤의 마리아는 아라곤의 국왕 페르난도 1세와 그의 아내인 알부르케르케의 레오노르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마리아가 태어났을때 마리아의 아버지는 아라곤의 국왕이 아니었고 카스티야의 인판테였을뿐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아버지인 페르난도는 카스티야의 국왕 후안 1세와 그의 아내인 아라곤의 레오노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페르난도의 형인 엔리케 3세는 아버지 후안의 뒤를 이어서 카스티야의 국왕이 되었습니다. 페르난도의 어머니인 아라곤의 레오노르는 아라곤의 페드루 4세의 딸로 아라곤의 후안 1세와 마르틴의 여동생이었습니다. 이런 관계 덕분에 페르난도가 아라곤의 왕위계승자 후보가 될수 있었으며 결국 아라곤의 왕위를 얻을수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아버지, 아라곤의 페르난도 1세

 

마리아의 어머니인 알부르케르케의 레오노르는 1대 알부르케르케 백작이었던 산초 알폰소와 포르투갈의 베아트리스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레오노르 역시 카스티야 왕가 출신이기도 했었는데 레오노르의 아버지였던 산초 알폰소는 카스티야의 국왕 알폰소 11세와 그의 정부였던 레오노르 데 구스만의 아들이었으며, 산초 알폰소의 형이었던 엔리케는 이복형이었던 카스티야의 페드로와 내전을 벌여서 결국 카스티야의 엔리케 2세로 즉위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어머니인 포르투갈의 베아트리스는 포르투갈의 국왕 페드루 1세와 그의 정부였다가 후에 아내가 되는 이녜스 데 카스트로의 딸이었습니다.  마리아의 할아버지였던 알폰소 11세는 레오노르 데 구스만을 매우 사랑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에게 엄청난 특권과 지위를 부여했었습니다. 이것은 알폰소 11세의 적자였던 카스티야의 페드로에게 큰 불만을 품게 만들었고 결국 복잡한 상황은 카스티야의 내전상황으로 발전했었습니다. 이때문에 알부르케케의 산초 알폰소는 영지와 특권을 많이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은 마리아가 많은 지참금을 가지고 갈수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어머니 알부르케르케의 레오노르

 

마리아의 부모인 페르난도와 레오노르가 결혼했던것은 복잡한 카스티야 왕가의 사정이 한몫했을 것입니다. 페르난도의 할아버지였던 엔리케 2세는 형인 페드로와 내전을 벌여서 승리를 거둬서 왕위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카스티야의 페드로와 그의 아내였던 마리아 데 파딜라의 딸들인 콘스탄사와 이사벨이 왕위계승을 주장하면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의 아들들인 랭카스터 공작과 요크 공작과 결혼했고 랭카스터 공작이었던 곤트의 존은 아내의 권리를 통해서 카스티야 왕위를 주장했었습니다. 결국 이 상황은 곤트의 존과 카스티야의 콘스탄사의 딸이었던 랭카스터의 캐서린이 페르난도의 형이었던 엔리케 3세와 결혼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게 됩니다. 

 

형인 엔리케 3세의 결혼이 결정된뒤 페르난도 역시 높은 신분에 자신에게 많은 재산을 가져다줄 신붓감을 찾아야했었습니다. 그리고 찾은 인물이 바로 알부르케르케의 레오노르였습니다. 레오노르는 알폰소 11세의 손녀이자 엔리케 2세의 조카였으며 또한 부유한 아버지를 통해서 많은 영지를 가져올수 있었습니다. 레오노르가 페르난도보다 6살이나더 많았기에 마리아 쪽에서 결혼이 더 급했지만, 페르난도의 형인 엔리케 3세가 결혼하기 전까지는 결혼할수 없었다고 합니다. 

 

정략결혼이었고  레오노르 쪽이 나이가 더 많았었지만 둘의 결혼은 매우 행복한 결혼이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마리아의 백부였던 엔리케 3세는 아들인 후안이 어릴때 사망했고, 후안은 1살의 나이로 후안 2세로 즉위햇었습니다. 이때문에 카스티야는 섭정이 필요했었는데 후안 2세의 섭정중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바로 마리아의 아버지였던 페르난도였습니다. 페르난도는 오래도록 카스티야의 섭정으로 조카를 대신해서 카스티야를 통치했었으며 이것은  후에 "아라곤의 인판테들"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마리아의 형제들이 카스티야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