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30편은 못채우겠네요.아하하..=-=
[새해특집]통치자이길 원했던 왕비 : 스웨덴의 로비사 울리카 왕비..(28) 에필로그 : 로비사 울리카의 후손들
로비사 울리카는 남편인 아돌프 프레드릭과의 사이에서 세명의 아들과 한명의 딸을 낳았습니다. 사실 이 자녀들이야말로 로비사 울리카가 스웨덴 내에서 정치적 활동을 할수 있게 만든 큰 바탕이 되었습니다.
로비사 울리카의 큰아들인 구스타브 3세는 어머니와 비슷한 성격이었습니다. 그때문에 그는 어머니와 마찰이 더 심했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죽은 직후 그는 둘째아들인 칼 구스타브가 태어났으며 어머니가 죽은 직후에 태어났기에 이 아들을 더욱더 사랑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이는 1년을 더 살지 못하고 죽었으며 아들의 죽음은 구스타브 3세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이후 구스타브 3세는 아내와의 사이도 멀어졌으며 정치적으로 더욱더 집중했습니다. 특히 그는 스웨덴의 "군인 국왕"의 예를 따르려했고 이것은 스웨덴이 지속적으로 전쟁을 하는 원인이 됩니다. 결국 국왕에 대한 불만이 가중되었고 어머니가 죽은 10년 뒤인 1792년 가장무도회에서 총에 맞고 결국 사망하게 됩니다.
로비사 울리카가 죽기 직전 만났던 손자였던 구스타브 4세 아돌프는 1792년 아버지가 암살당한뒤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는 전통적인 스웨덴의 프랑스 지지정책을 따랐는데 특히 프랑스 왕가에 대한 동맹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 혁명정부에 대해서 전쟁을 선포하게 됩니다. 이것은 러시아에 핀란드 침공의 빌미를 제공한것으로 이후 스웨덴은 핀란드를 완전히 뺏기에 됩니다. 이렇게 되자 스웨덴 내 귀족들은 국왕을 쫓아내기로 결심했으며 결국 구스타브 4세 아돌프는 스웨덴 왕위에서 쫓겨났고 가족과 함께 스웨덴을 떠나 망명생활을 해야했습니다.
로비사 울리카의 둘째아들이었던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은 어머니의 성격을 닮았던 형과 달리 좀더 온화했다고 알려진 아버지를 더 닮았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구스타브 3세가 비록 동생이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했었어도 동생에게 여러 지위를 부여하고 도움을 받았던 것과 연결이 될듯합니다. 그는 군인으로 어느정도 능력이 있었는데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함대 제독으로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었습니다. 구스타브 3세의 인기가 떨어지게 되면서 야심 많았던 아내 헤드빅 엘리자베트가 남편을 왕위에 올리려는 쿠데타를 꾸몄고 칼은 처음에는 동조하는 듯했지만 결국 아버지가 그랬던것처럼 허락하지 않아서 무산이 되기도 했었습니다.
칼은 형이 죽자 조카의 섭정으로 권력을 장악했지만, 정치에 그다지 집중하지 않았었으며 측근이 권력을 대행했었습니다. 칼은 조카인 구스타브 4세 아돌프와 친하지 않았기에 조카가 성인이 되어 섭정자리에서 물러난뒤 정치에 관여하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구스타브 4세 아돌프가 쫓겨난 뒤 칼은 조카의 뒤를 이어서 국왕 칼 13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처럼 정치에 그다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그의 아내인 헤드빅 엘리자베트가 정치에 더 직접적으로 관여했습니다. 칼 13세는 후손이 없었기에 조카의 아들이자 이전의 왕태자였던 구스타브 구스타브손을 후계자로 삼고 싶어했지만 의회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결국 그는 프랑스 장군이었던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가 왕위계승자로 선출되자 그를 양자로 삼아서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로비사 울리카의 셋째아들인 외스테르예틀란드 공작 프레드릭 아돌프였습니다. 그는 가족들 사이의 중재자로 자리잡았는데 이를테면 문크 사건때 그는 형인 어머니가 이런 소문을 퍼뜨렸다고 믿고 있는 형에게 어머니를 옹호하면서 이미 소문은 다 퍼졌으며 어머니가 퍼트린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면서 어머니를 옹호했었습니다. 또 로비사 울리카가 죽기전에형을 어머니에게 데려와서 둘이 서로화해하도록 만들기도 했었습니다.
프레드릭 아돌프는 군인으로 능력이 있던 인물이었으며 사교적 인물이었습니다만, 수많은 여성들과 관계가 있었고 이것은 아마도 그의 평판을 나쁘게 했을 것입니다. 그는 여러 여성들과 결혼하고 싶어했지만 결혼은 성사되지 않았으며 평생 미혼으로 지냈습니다.
로비사 울리카의 막내는 딸인 소피아 알베르티나였습니다. 소피아 알베르티나는 주로 어머니와 함께 했었으며 오빠인 프레드릭 아돌프와 함께 어머니 편을 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소피아 알베르티나는 오빠의 궁정에서 주로 활발하게 지냈었는데 올케언니인 소피아 마그달레나가 소심하고 부끄러워했던반면 소피아 알베르티나는 활발히 궁정생활을 했었습니다. 특히 소피아 알베르티나는 궁정에서 여성들이 무시당하거나 모욕당하는 것을 못참았었습니다. 또 소피아 알베르티나는 어머니처럼 정치적인 문제에 관여하는 것도 적극적이었습니다.
소피아 알베르티나는 결혼 계획이 있었지만 성사되지 않았고 미혼으로 지냈기에 여러가지 소문이 돌기도 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가 국왕 프레드릭 1세의 아들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헤센슈타인과 사랑에 빠져서 그와 결혼하길 원했다거나 그와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피아 알베르티나는 외삼촌인 프리드리히 2세로부터 퀴들린부르크 수녀원장 지위를 받았습니다만, 결국 1802년 퀴들린부르크가 프로이센에 합병되면서 그녀의 수입은 보장되었지만 결국 퀴들린부르크를 떠나 스웨덴으로 돌아가야했습니다. 소피아 알베르티나는 스웨덴의 왕태자 칼 요한이 된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칼 14세 요한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그의 정통성을 지지하는 상징적 인물로 궁정에 남아서 여러 의식에 참석했었습니다.
로비사 울리카의 자녀들중 후손을 남긴 사람은 구스타브 3세밖에없었습니다. 하지만 손자인 구스타브 4세 아돌프는 스웨덴 왕위에서쫓겨났으며 구스타브 4세 아돌프의 자녀들은 스웨덴의 왕자/공주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게 됩니다. 구스타브 4세 아돌프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구스타브 구스타브손은 평생 스웨덴 왕위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구스타브 4세 아돌프의 장녀인 소피아는 바덴의 대공과 결혼했었습니다. 그리고 소피아의 손녀였던 바덴의 빅토리아는 스웨덴의 구스타브 5세와 결혼했고 현 스웨덴 국왕의 증조할머니가 됩니다. 결국 현 스웨덴 국왕 역시 로비사 울리카의 후손이기도 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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