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정치 이야기만 하다가 끝낼분위기군요..ㅠ.ㅠ
[새해특집]통치자이길 원했던 왕비 : 스웨덴의 로비사 울리카 왕비...(24) 남편의 죽음과 아들과의 갈등
로비사 울리카는 점차 스웨덴에서 왕권이 강해질것이라고 믿었으며 헌법이 변경될것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개헌에는 성공하지 못했으며 이것은 로비사 울리카에게 좌절감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이제 로비사 울리카의 지위는 점차 퇴색해져가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로비사 울리카의 아들인 구스타브가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왕태자는 스웨덴인으로 스웨덴에서 성장했으며 스웨덴에서 교육받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어머니보다 훨씬 더 정치적으로 민감했으며 또 어머니보다 더 식견이 뛰어났습니다. 그는 외국과의 동맹 관계에 대해서 단순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외국 세력이 스웨덴의 위협이 되거나 이익이 되는 것을 아주 명확하게 보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1770년 외삼촌인 하인리히 왕자가 프로이센 왕족으로 처음으로 스웨덴을 방문하게 됩니다. 이 방문이후 하인리히 왕자는 러시아로 갔었는데, 친정 식구의 방문에 기뻐했던 로비사 울리카와는 달리 구스타브는 그가 러시아에 가는 이유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이 하인리히 왕자의 방문에서 폴란드 분할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것이 분명했으며 구스타브 역시 이를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리고 구스타브는 러시아의 숙적이었던 폴란드가 몰락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다음 차례는 스웨덴이 될수 있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리고 구스타브는 프랑스와의 동맹에 대해서 더욱더 고민하게 됩니다.
스웨덴의 내정문제는 여전히 심각했고 스웨덴은 프랑스의 보조금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내에서 스웨덴의 역할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고는 이들이 많았으며 국왕 루이 15세는 여기에 영향을 받습니다. 이에 스웨덴에서는 왕자들을 보내서 프랑스 왕가와 우호를 도모하고 프랑스측에 어필하려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왕태자인 구스타브가 가게 됩니다. 1771년초 프랑스에 도착한 구스타브는 그리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리라 생각했지만 상황이 바뀌게 됩니다. 바로 그의 아버지인 아돌프 프레드릭이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1771년 2월 12일 아돌프 프레드릭은 식사도중 뇌졸중으로 쓰러졌습니다. 함께 있던 궁정 조신들은 국왕을 서둘러 왕비에게 데려갔고 결국 아돌프 프레드릭은 아내의 품안에서 사망했습니다. 비록 한때 한눈을 팔긴했었지만 아돌프 프레드릭은 온화한 인물로 아내에게 나쁘지 않은 남편이었습니다. 로비사 울리카 역시 남편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남편의 죽음은 로비사 울리카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하지만 후계자인 구스타브는 나라에 없었으며 이것은 정치적 불안정요소였습니다. 그렇기에 로비사 울리카는 남편의 죽음에 대해서 슬퍼만 할수는 없었습니다.
가장 미묘한 상황은 뫼소르나쪽에서 하타르나가 지지하는 구스타브 대신 그의 동생이자 뫼소르나와 더 가까웠던 칼 왕자를 국왕으로 내세우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때 칼 왕자는 이를 거절했으며 로비사 울리카 역시 구스타브에게 동생이 형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국왕이 없는 것은 스웨덴 내에서 문제가 될수 있었고, 로비사 울리카가 섭정이 되어야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로비사 울리카 역시 이 계획에 마음이 흔들리지만 결국 이 일은 없었던 것이 됩니다. 로비사 울리카는 스웨덴 내에서 그리 이미지가 좋지 않았으며, 과부가 된 왕비는 대부분 궁정에서 은퇴하고 국왕의 아내인 새로운 왕비가 궁정의 중심인물이 되어야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로비사 울리카가 원래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며느리인 소피아 마그달레나를 더 욱더 냉대하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소피아 마그달레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지만, 왕비의 지위때문에 로비사 울리카가 내놓아야하는 지위를 얻게 된 것에 대해서 더욱더 반감이 커졌을 것입니다. 못마땅한 며느리가 자신의 지위마저 뺏는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로비사 울리카의 상황과 달리 구스타브의 상황은 훨씬 더 좋았습니다. 의회는 그를 국왕으로 선포해서 구스타브 3세가 되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서둘러 구스타브가 돌아갈수 있게 해줍니다. 특히 루이 15세는 자신과 동갑이었던 아돌프 프레드릭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깊이 동정했으며, 아버지를 잃은 젊은 구스타브 3세가 자리를 잡을수 있게 의회에 동맹 부담금을 주기로 했으며 구스타브 3세에게 개인적으로 돈을 주기도 했었으며 군사적 지원을 약속하기까지 했습니다. 구스타브 3세는 돌아오는 길에 외삼촌인 프리드리히 2세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구스타브 3세는 외삼촌에게 매우 좋은 인상을 남겼었는데, 특히 구스타브 3세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생각하도록 행동했었습니다. 이를테면 외삼촌에게 프랑스와 어떤 비밀조약도 맺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구스타브 3세가 이미 프로이센의 방향과 스웨덴의 방향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스타브 3세는 어머니보다 더 뛰어난 정치가였던 것이 외삼촌이라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에 속이는 것을 서슴치 않았으며 심지어 연기조차 뛰어나게 해서 외삼촌이 믿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1771년 3월 드디어 구스타브 3세가 스웨덴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국왕은 오자마자 어머니를 만나러 갔으며 어머니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로비사 울리카가 아들이 자신의 영향력아래 있거나 적어도 자신을 존중해준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자 사이는 곧 벌어지게 되는데 구스타브 3세는 당연히 자신의 궁정을 만들었고 자신의 측근들을 주변에 두게 됩니다. 이것은 이전의 로비사 울리카의 측근들이 궁정에서 밀려나는 것을 의미했었으며 로비사 울리카는 아들이 자신을 소홀히하고 정치에서 배제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로비사 울리카는 과부가 된 왕비로 궁정에서 은퇴하기 보다는 여전히 정치에 관여하고 싶어했었습니다. 그녀는 평생 그렇게 살았으며 비록 남편이 죽고 없지만 남편이 살아있었을때도 남편의 간섭없이 정치에 참여해왔었습니다. 그렇기에 로비사 울리카는 아들이 즉위했다고 해서 자신이 정치에서 배제되는 것을 이해할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구스타브 3세는 그의 아버지 같은 인물이 아니었고 도리어 어머니 로비사 울리카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자신이 국왕이 되었는데 어머니가 정치에 간섭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여겼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정치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는 것이 이익이 된다고 여겼습니다. 이렇게 모자간의 갈등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새해특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해특집]통치자이길 원했던 왕비 : 스웨덴의 로비사 울리카 왕비..(26) 문크 사건 (0) | 2022.02.07 |
---|---|
[새해특집]통치자이길 원했던 왕비 : 스웨덴의 로비사 울리카 왕비..(25) 구스타브 3세와의 갈등 : 쇠데르만란드 공작의 결혼 (0) | 2022.02.04 |
[새해특집]통치자이길 원했던 왕비 : 스웨덴의 로비사 울리카 왕비...(23) 남편과 아들 (0) | 2022.02.02 |
[새해특집]통치자이길 원했던 왕비 : 스웨덴의 로비사 울리카 왕비...(22) 외국 세력의 개입과 좌절 (0) | 2022.02.01 |
[새해특집]통치자이길 원했던 왕비 : 스웨덴의 로비사 울리카 왕비...(21) 7년전쟁과 재기 (0) | 2022.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