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특집

[새해특집]통치자이길 원했던 왕비 : 스웨덴의 로비사 울리카 왕비...(23) 남편과 아들

엘아라 2022. 2. 2.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이게 참조 자료가 스웨덴 정치에서 로비사 울리카의 역할에 대해서 설명하는 이야기라서 정치 이야기만 나옵니다.

일단 대충읽고 시작했더니 아하하...정치 이야기만 주구장창하는듯하네요.

여기서 빠져나와야하는데 흑...

 

[새해특집]통치자이길 원했던 왕비 : 스웨덴의 로비사 울리카 왕비...(23) 남편과 아들

 

로비사 울리카가 스웨덴 내에서 정치적 활동을 활발히 할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남편의 존재였습니다. 로비사 울리카의 남편인 아돌프 프레드릭은 아내와 달리 왕권 강화에 소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가장 큰 이유는 아돌프 프레드릭이 의회에 의해서 국왕으로 선출된 사람이라는 점일듯합니다. 게다가 그는 스웨덴 왕가와 직접적 혈연관계도 아니었기에 그는 더욱더 조심할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반면 로비사 울리카는 프로이센 공주로 스웨덴의 왕위계승자와 결혼했었기에 정통성이 남편보다 더 확고했으며 또한 프로이센이라는 강력한 배경이 있어서 남편보다 더 적극적 정치활동을 할수 있었을 것입니다.

 

스웨덴의 아돌프 프레드릭, 로비사 울리카의 남편

 

스웨덴의 국왕으로 아돌프 프레드릭은 실권이 거의 없었으며 이것은 아마 그가 소극적이었지만 아내인 로비사 울리카의 행동을 지지한느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의회와 아내의 눈치를 보는 삶이 계속 되면서 그는 새로운 위안처를 찾게 됩니다. 바로 주변의 여성들에게 눈을 돌린것이었습니다. 로비사 울리카와 아돌프 프레드릭은 궁정내 프랑스 춤과 연극등을 도입했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등지에서 배우나 발레리나들이 스웨덴으로 오게됩니다.  아돌프 프레드릭은 이런 여성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합니다. 물론 기존의 궁정에 있던 여성들과도 관계를 맺었으며 당연히 정치적으로 국왕과 대립각을 세우던 사람들은 그의 행동에 대해서 대놓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로비사 울리카에게는 상처가 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녀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노력하는 동안 남편은 거의 하는 일이 없었을뿐만 아니라 자신의 노고에도 다른 여성에게 한눈을 팔고 그걸 대중이 다 알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롤로테" 포르스보리, 아돌프 프레드릭의 사생아 딸로 추정

 

남편의 이런 행동은 로비사 울리카가 자녀들 특히 장남인 구스타브에게 엄청난 관심을 집중하도록 만들었을 것입니다. 구스타브는 왕권을 강화해야한다는 어머니 로비사 울리카의 생각을 공유했었습니다. 그 역시 국왕이 거의 상징적 존재이다시피해진 스웨덴에서 왕권을 강화해야한다고 여겼었습니다. 하지만 실제적인 생각은 그의 어머니와는 좀 달랐습니다. 로비사 울리카가 양 정당 모두를 끌어들어야한다고 생각했다면, 구스타브는 주로 하타르나와의 관계를 더 중요시했습니다. 게다가 구스타브는 로비사 울리카가 가지지 못한 중요한 것을 하나 더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정당한 왕위계승자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로비사 울리카는 외국 왕비였으며 스웨덴의 정치 체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외국의 체제인 절대주의를 도입하려했다고 여겨졌었습니다. 그리고 7년 전쟁 이후 왕권이 강화되어야한다고 어느정도 합의를 보긴 했었지만 하타르나와 뫼소르나 모두 로비사 울리카가 여전히 절대주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고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구스타브는 스웨덴인으로 스웨덴에서 교육을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하타르나와 가까웠으며 이들의 걱정도 잘 이해했었기에 어쩌면 스웨덴 사람들은 로비사 울리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구스타브에게 어머니보다는 많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로비사 울리카의 입장에서는 이런 아들은 아마도 좋은 원군으로 여겨졌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남편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이 내각과 의회등에 참여해서 정치에 관여하길 바라게 됩니다. 일찍부터 아들이 내각에 참여하길 바랬지만 이것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만 1766년 이후 구스타브는 정식으로 정치에 관여하게 됩니다.

 

로비사 울리카의 장남 구스타브 후에 스웨덴의 구스타브 3세

 

 

 

그러나 이때부터 로비사 울리카와 구스타브는 갈등이 이미 시작됩니다. 둘의 갈등이 눈으로 드러난 것은 바로 구스타브의 결혼 문제였습니다. 스웨덴 정부는 외교적 관계 때문에 덴마크의 공주였던 소피 마그달레느와 구스타브가 약혼시켰었습니다. 로비사 울리카는 이에 대해서 매우 반발이 심했는데 일단 로비사 울리카는 자신의 조카를 며느리로 맞고 싶어했었습니다. 하지만 의회가 자신의 뜻을 무시하자 아마도 로비사 울리카는 이것은 의회가 월권한 것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왕비이자 어머니인 그녀가 반대하는 약혼에 대해서 의회가 그대로 밀어붙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로비사 울리카가 재기하고 어느정도 정치적, 외교적 힘을 얻게 되자 이 문제에 대해서 다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합니다. 어쩌면 이전의 자신의 권위가 손상되었던 것에 대해서 어느정도 보상받으려 했었던 것일수 있습니다. 로비사 울리카는 덴마크와의 약혼을 깨려했지만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당연히 외교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했고 오빠와 예카테리나 2세를 설득해서 이 결혼을 깨려했었습니다. 하지만 스웨덴 정부는 여전히 이 결혼에 대해서 좋게 봤는데 결정적으로 구스타브가 어머니의 뜻에 반해서 소피 마그달레느와 결혼하겠다고 결정합니다. 

 

1766년 10월 덴마크의 소피 마그달레느는 스웨덴의 왕위계승자인 구스타브와 결혼해서 로비사 울리카의 며느리가 됩니다. 하지만 로비사 울리카는 자신의 체면을 구기면서까지 맞이하게 된 며느리에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소피 마그달레느와 아들의 결혼은 로비사 울리카에게 이전의 자신이 패배했던 것을 상기시키는 것일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정치에 별 관심이 없고 얌전한 성격의 며느리에 대해서 로비사 울리카는 아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라고 여겼을 수 있습니다. 마치 로비사 울리카의 남편인 아돌프 프레드릭이 로비사 울리카의 일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덴마크의 소피 마그달레느, 스웨덴의 소피아 마그달레나 왕비, 로비사 울리카의 며느리

 

비록 장남과 어느정도 갈등의 징조가 있었지만 로비사 울리카와 구스타브의 목표는 동일했으며 모자는 점차 더 스웨덴에서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을 합니다. 특히 1768년 12월 둘은 국왕 아돌프 프레드릭을 설득해서 이전에 내각이 국왕의 허락없이 도장을 찍어서 결재하던 방식에 대해서 거부하게 만듭니다. 이 상황은 결국 당시 내각의 불신임으로 이어졌으며 새로운 내각이 구성됩니다. 재미난 것은 이때 또 한번 쿠테타에 대한 언급이 나오게 됩니다만 이때 로비사 울리카는 쿠데타를 반대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로비사 울리카는 점차 더 스웨덴 내의 정치 상황에 적응해가면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앞으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