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특집

[새해특집]통치자이길 원했던 왕비 : 스웨덴의 로비사 울리카 왕비...(22) 외국 세력의 개입과 좌절

엘아라 2022. 2. 1.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엉엉엉...ㅠ.ㅠ 네편내로 끝낼수 있을까요 엉엉엉..ㅠ.ㅠ

어쨌든 음력 새해도 시작되니 여전히 새해특집이긴 하네요 아하하 =-=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

 

[새해특집]통치자이길 원했던 왕비 : 스웨덴의 로비사 울리카 왕비...(22) 외국 세력의 개입과 좌절

 

로비사 울리카는 7년 전쟁을 통해서 정치적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로비사 울리카의 정치적 입지는 더 강화되는데 7년 전쟁이후 하타르나들에 대한 인기가 떨어지고 다시 한번 뫼소르나들이 힘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로비사 울리카 역시 이제 하타르나 뿐만 아니라 뫼소르나와도 연대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로비사 울리카 

 

당시 스웨덴의 정치 상황은 외국 세력간의 영향으로 인해서 복잡하게 됩니다. 스웨덴에 영향을 미치던 주요 세력은 프로이센,프랑스,러시아,영국 이렇게 네개였습니다. 그중 특히 러시아 상황은 매우 복잡했는데 1762년 초 표트르 3세가 러시아 황제가 되면서 프로이센은 되살아날수 있었으며, 로비사 울리카 역시 힘을 얻게 됩니다. 표트르 3세는 아돌프 프레드릭의 5촌 조카였으며 이런 관계로, 스웨덴에서 국왕 권한을  확대하는 헌법을 스웨덴에서 승인하는 것에 지지해주기로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해 여름 표트르 3세는 아내인 예카테리나 2세에게 폐위당한후 사망하게됩니다. 이 상황은 스웨덴은 물론 프로이센에도 매우 위협적인 일이었는데 일단 예카테리나 2세는 남편이 프로이센과 맺은 조약을 그대로 승인해주게 됩니다. 이것은 프리드리히 2세가 러시아와의 관계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생각하는 원인이 됩니다. 그리고 예카테리나 2세는 스웨덴의 왕권 강화에 관심이 없었으며 로비사 울리카가 러시아의 지원을 받을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예카테리나 2세는 스웨덴의 안정된 상황을 원하고 있었으며 이때문에 스웨덴 내에서 로비사 울리카의 뜻대로 왕권을 강화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급격한 변화를 원하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리고 프로이센 역시 이에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스웨덴과의 외교 관계를 회복했으며 1764년 영국 외교관이 다시 스웨덴에 상주하게 됩니다. 영국의 목표는 프랑스 세력을 견제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서 로비사 울리카를 지원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스웨덴 내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나라는 프랑스였습니다. 프랑스는 외교동맹의 댓가로 스웨덴에 돈을 주고 있었으며 이것은 스웨덴이 프랑스에 의존하는 가장 큰 이유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비효율적이 되었으며 특히 7년 전쟁이후 상황에서 로비사 울리카가 왕권강화를 위해서 프랑스의 적대적 세력이었던 나라들인 프로이센과 영국 그리고 러시아에 접근하는 것에 대해서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예카테리나 2세

 

스웨덴 내에서는 전통적으로 하타르나가 프랑스쪽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며 뫼소르나가 영국과 러시아를 지지했었으며 영국과 러시아가 같은 편이 되면서 뫼소르나는 다시 정치적 입지가 더 강해지게 됩니다. 

 

로비사 울리카는 1762년 평화협정의 공으로 원하던 여러가지를 얻을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원하던 국왕의 권한을 강화한 개헌의 경우는 결론을 내지 못했으며 이후로 미루기로 했었습니다. 로비사 울리카는 다음 의회가 열릴때까지 스웨덴 내에서 하타르나와 뫼소르나 모두와 협상을 해서 왕권 강화를 위한 바탕을 마련합니다. 특히 로비사 울리카는 어느 한쪽 정당만으로 헌법을 개정해서 왕권을 강화할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결국 두 정당을 모두 끌어들이려했습니다. 이것은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게 되는데 특히 1765년이 되면서 헌법 개정에 대한 공감이 커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로비사 울리카의 행동은 매우 애매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왜냐면 하타르나와 뫼소르나 이들은 갈등을 빚고 있었으며 특히 하타르나는 프랑스를 지지했었고 뫼소르나는 영국-러시아를 지지했었기에 이들 나라들이 경쟁관계에 있는 한 두 정당은 하나가 될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이런 상황은 로비사 울리카가 하타르나와 뫼소르나 모두에게 의심을 받는 원인이 되었으며 프랑스나 영국과 러시아 모두가 로비사 울리카의 행동에 대해서 의심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특히 예카테리나 2세는 로비사 울리카나 아돌프 프레드릭이 정치에 관여하지 말고 현 상태로 스웨덴이 유지되길 바랬으며 이에 대해서 프리드리히 2세에게 여동생을 말리라는 편지를 쓸 정도였습니다. 결국 개헌은 실패하게 됩니다.

 

칼 빌헬름 폰 뒤벤, 로비사 울리카가 러시아에 보낸 스웨덴 대사

 

로비사 울리카는 7년 전쟁으로 재기의 기회를 마련했으며 이전의 실수로부터 교훈을 얻어서 스웨덴 정치에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접근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스웨덴의 정치 상황은 유럽 강대국들의 대리전 양상으로 발전했으며 이것은 로비사 울리카가 바라던 일을 하는데 큰 방해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