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25편으로 끝내보려고합니다만 과연 될지는 흑
[새해특집]통치자이길 원했던 왕비 : 스웨덴의 로비사 울리카 왕비...(21) 7년전쟁과 재기
1756년 로비사 울리카의 쿠데타 시도가 실패하면서 스웨덴 내의 왕권은 더욱더 약해져서 완전히 상징적 존재로 남게 됩니다. 게다가 로비사 울리카는 쿠데타의 배후로 지목되었으며 주변 측근들마저 처형당했기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려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해의 상황은 로비사 울리카가 스웨덴에서 다시 한번 기반을 다질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로비사 울리카가 스웨덴 내에서 위기를 겪고 있을때, 친정인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크나큰 분쟁에 휩쌓이게 됩니다. 바로 7년전쟁이었습니다. 이 7년 전쟁은 여러가지로 새로운 유럽의 질서를 편성하는것이었는데 특히 이전의 외교질서와는 전혀 다른 동맹관계를 맺는 것이기도 했었습니다. 7년 전쟁이 일어나게 된 가장 큰 이유중 하나는 바로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점령에 있습니다. 이전에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이 일어나면서 이전의 유럽 질서는 깨지게 되는데 특히 로비사 울리카의 오빠였던 프리드리히 2세는 이때 슐레지엔을 장악했으며, 이것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평생 프로이센과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해서 적대적 감정을 갖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슐레지엔 지방을 중요시했던것만큼 마리아 테레지아 역시 슐레지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곳을 뺏긴것에 대해서 매우 분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프랑스를 적대시하던 기존의 외교관계를 완전히 바꾸는 계기가 됩니다.
7년전쟁이 일어나기전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하게 됩니다. 이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오래도록 프랑스 왕가와 유럽의 패권을 두고 숙적 관계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매우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반면 프랑스와 갈등을 빚고 있던 영국은 전통적으로 오스트리아의 동맹이었지만 이 당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동맹을 맺자 위기감을 느끼고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게 됩니다. 결국 영국과 프로이센이 한축이 되고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한 축이 되어서 일어난 전쟁이 7년전쟁인 것입니다.
7년전쟁이 시작되면서 스웨덴의 입장은 애매해지게 됩니다. 스웨덴은 기본적으로 프랑스와 러시아와의 외교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프랑스와 러시아가 경쟁관계였었지만 이제는 한편이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스웨덴은 외교적 관계에 의해서 영국-프로이센과의 적대적 관계로 끌려 들어갈수 밖에 없게 됩니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스웨덴이 포메른 지방에서 프로이센과 대치하길 바랍니다. 이런 상황은 프로이센이 뒷쪽에서 전선히 하나더 형성하는 것으로 프로이센에 불리할수 밖에 없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스웨덴 내에서는 7년 전쟁에 참전하는 것은 애매한 문제였습니다. 프랑스와 러시아가 압력을 가하고 있었지만 스웨덴 내에서 전쟁에 참전하는 것에 대해서 반발하는 사람들 역시 존재하게 됩니다. 하지만 정권을 잡고 있던 하타르나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었으며 결국 프로이센에 대해서 스웨덴은 선전포고를 하게 됩니다.
로비사 울리카는 당연히 스웨덴이 전쟁에 참전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는데 친정인 프로이센을 공격하는 것이었을뿐만 아니라 남편의 왕위계승권리에 위협이 된다고 여겼습니다. 로비사 울리카와 아돌프 프레드릭은 이 전쟁의 끝은 결국 아돌프 프레드릭의 폐위로 이어질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이전 스웨덴 왕가인 팔츠-츠바이브뤽켄 가문의 분가 출신으로 한때 스웨덴 왕위계승자가 되려고 노렸었으며 또한 정치적으로 뛰어난 인물이기도 했었던 팔츠-츠바이브뤽켄의 크리스티안 4세가 스웨덴의 왕위를 이을것이라 여겼었습니다. 그랬기에 로비사 울리카는 스웨덴의 프로이센 공격을 반대했었습니다. 그리고 프로이센과 영국과의 연결고리를 이용하게 됩니다. 프로이센은 스웨덴의 적국이었기에 직접적으로 오빠와 연락할수는 없었지만 간접적으로 프로이센과의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고 있었습니다.
로비사 울리카는 스웨덴 내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소리가 커져가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집권당에 대한 반대로 이어졌으며 이것은 하타르나의 정적이었던 로비사 울리카에게 다시 정치적 지지세력들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스웨덴과 프로이센간의 전쟁이 계속 이어지게 되면서 스웨덴 내에서 반전에 대한 압력이 더욱더 거세지게 되었으며 집권당에 대한 불만 역시 더욱더 커져가게 됩니다. 이것은 로비사 울리카가 정치적 역할을 담당하는데 중요한 상황이었습니다. 로비사 울리카는 프로이센 공주로 오빠인 프리드리히 2세와의 평화 협정을 체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수 있었습니다. 로비사 울리카는 자신의 지위를 알고 있었으며 하타르나에 대해서 국왕에 대한 권리를 회복하는 것을 협상 조건으로 내세우려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시도에 대해서 프리드리히 2세는 여전히 여동생에게 스웨덴 국내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고 충고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프로이센의 처지가 나빠지기에 비록 스웨덴과의 전투가 지지부진하더라도 프로이센이 스웨덴을 완전히 물리칠 여력이 부족했기 동생의 지위가 흔들린다면 후에 스웨덴과 프로이센 사이에서 동생이 역할을 할수 없게 될수 있었기 때문일듯합니다.
하지만 1762년이 되면서 상황은 반전됩니다. 바로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고 프리드리히 2세에게 열광적이었던 표트르 3세가 즉위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프리드리히 2세는 기사회생할수 있었으며 결국 스웨덴과 프로이센은 평화협정을 체결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이 평화협정을 체결하는데 로비사 울리카가 적극적으로 역할을 담당했었습니다. 로비사 울리카의 오빠인 프리드리히 2세는 여동생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이것은 로비사 울리카가 스웨덴 내에서 정치적 기반을 다시 되찾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의회는 로비사 울리카의 노고에 감사를 표했으며 이전의 1756년의 상황에 대해서 많은 것을 되돌리게 됩니다. 이를테면 로비사 울리카의 측근들에게 내려졌던 사형 판결을 사면해주기도 했었으며 또 다른 측근들이 다시 궁정으로돌아올수 있도록 해줬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로비사 울리카가 정치적으로 다시 관여할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로비사 울리카는 이제 서두르지 않습니다. 물론 여전히 왕권을 더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긴 했지만 이전처럼 성급하게 하지 않았으며 천천히 스웨덴 내의 상황을 봐가면서 바꿔가려했습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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