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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특집]통치자이길 원했던 왕비 : 스웨덴의 로비사 울리카 왕비...(19) 스웨덴의 왕비 :정치적 갈등의 정점

엘아라 2022. 1. 27.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이렇게 쓰다가는 30편은 쓰겠습니다.ㅠ.ㅠ

줄여야할텐데 말입니다.

 

[새해특집]통치자이길 원했던 왕비 : 스웨덴의 로비사 울리카 왕비...(19) 스웨덴의 왕비 : 정치적 갈등의 정점

 

1750년대 중반이 되면서 국왕 부부는 귀족들과의 관계가 점차 더 악화됩니다. 하타르나가 집권했었지만 이제 하타르나들은 국왕 부부와 갈등을 빚기 시작했으며 국왕 부부는 자신들에게만 충성하는 귀족들인 "궁정파"를 기용해서 이들을 견제하려했습니다. 결국 예전에는 하나르나와 뫼소르나가 정권을 두고 다툼을 벌였다면 이제는 국왕 부부를 중심으로 하는 궁정파와 그 이외의 하타르나들이 갈등을 빚는 양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정치 활동의 중심에 로비사 울리카가 있었습니다. 

 

로비사 울리카

 

하타르나들은 이전에 국왕 부부를 지지했었지만 이제는 국왕 부부와 적대적 관계가 되었으며. 로비사 울리카의 측근 중에서 로비사 울리카에 대해서 적대적으로 변한 사람들 역시 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헨리카 율리아나 폰 리벤이었습니다. 로비사 울리카의 첫 시녀중 하나였으며 로비사 울리카가 엄청나게 신임했었던 한스 헨드릭 폰 리벤의 여동생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녀는 신문의 익명 기고자중 한명으로 알려져있는데 1756년경의 의회가 소집되었을때 왕비에 대한 여러가지 악의적 이야기가 출판되는데 기여했다고 추정됩니다. 

 

스웨덴 내에서 국왕 부부와 하타르나를 중심으로 하는 귀족들간의 갈등이 더 심해지게 됩니다. 특히 중요한 지위를 두고 하타르나와 국왕파간의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국왕 부부는 당연히 이런 지위에 사람을 임명하는 것은 국왕의 권한이라 여겼습니다만, 하타르나들은 이런 국왕 부부의 행위는 법을 위반한 것이라 여겼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귀족들은 국왕이 월권행위를 한다고 여기게 되었으며 국왕 부부를 더욱더 압박하게 됩니다. 

 

에릭 브라헤, 궁정파 중 한명으로 로비사 울리카와 아돌프 프레드릭의 신임을 받았던 인물중 한명이었습니다.

 

로비사 울리카를 비롯한 궁정파는 집권한 하타르나에 대항하려합니다. 그중 하나가 농민반란이 있었습니다. 당시 스웨덴 내의 농민들은 신분제의회에 들어가있긴 했지만 이들이 정치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못했었습니다. 결국 국정 상황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자신의 불만을 반란형태로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스웨덴의 국정을 운영하던 인물들은 국왕이 아니라 하타르나를 중심으로 하는 귀족들이었으며 농민반란은 이들에 대한 저항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로비사 울리카가 관여합니다만, 사실 이것은 비밀이 아니었습니다. 이전에 일어난 농민 반란에 대해서도 로비사 울리카가 관여했다는 소문이 지속적으로돌았었기 때문입니다. 농민 반란은 곧 진압되는데 이것은 아마도 의회나 내각에서 로비사 울리카에 대한 더욱더 심하게 의심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정치적 갈등이 심해지면서 모든 면에서 국왕부부와 반대파들이 부딪히게 됩니다. 이를테면 국왕 부부의 아들 특히 장남이자 후계자인 구스타브의 교육에 대해서도 국왕 부부가 정한 가정교사에 대해서 하타르나들은 반발하고 그들을 해임했을뿐만 아니라 심지어 왕태자를 국왕 부부에게서 떼어놓아야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습니다. 또 국왕 부부의 권위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스웨덴 내에서 왕비와 왕비의 가족들 즉 프로이센 왕가 사람들에 대한 가십성 이야기들이 떠올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에 대해서 로비사 울리카의 오빠인 프리드리히 2세는 매우 불쾌하게 여길정도였습니다.  게다가 국정 상황에 대해서 국왕이 어떤 안건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하자, 내각에서는 이전에 프레드릭 1세가 뇌졸중 이후 서명이 아닌 도장을 찍던 방식을 그대로 들여와서 국왕이 서명을 거부하더라도 도장을 찍어서 안건을 통과시켜버리기도 했었습니다.  국왕을 대놓고 무시하고 심지어 아들마저 뺏길 지경에 이르자 로비사 울리카는 더욱더 참을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로비사 울리카의 장남 구스타브, 후에 구스타브 3세

 

하지만 이때 로비사 울리카는 정치 자금 마저 부족하게 됩니다. 로비사 울리카는 의회사람들을 회유하기 위해 뇌물을 주기도 했었으며, 또 농민 반란에도 지원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고 또 수많은 시도로 인해서 자금이 바닥날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비사 울리카는 또다른 계획이 있었으며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기에 이미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돈을 빌리려 했었습니다.  이를테면 형부였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로비사 울리카에게 돈을 빌려주기도 했지만 로비사 울리카는 더 많은 돈이 필요했는데 이를테면 로비사 울리카는 오빠인 프리드리히 2세에게 형부에게서 빌린 돈의 거의 10배에 달하는 돈을 빌려달라고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나 영국에 대해서 자신을 지지해달라고 하면서 프랑스나 영국등이 스웨덴의 귀족들에게 지원하던 돈을 자신에게 지급해달라고도 했었습니다. 이런 시도가 모두 성공하지 못하면서 로비사 울리카는 결국 남동생인 아우구스트 빌헬름을 통해서 자신의 보석을 저당잡히기로 결정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로비사 울리카의 측근 시녀중 한명이었던 울리카 스트룀펠트가 이 사실을 내각에 보고하게 됩니다. 

 

울리카 스트룀펠트, 로비사 울리카의 시녀

 

스웨덴에서 로비사 울리카가 결혼할때 받은 보석들은 로비사 울리카 개인에게 준것이 아니라 "스웨덴의 왕태자비"에게 준 공적인 물건이라고 여겼었습니다. 하지만 테신이 보석을 줄때 좀 애매했었고 이때문에 로비사 울리카는 이 보석들이 자신의 개인 소유라고 생각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상황은 점차 나빠지면서 로비사 울리카는 보석들을 다시 돌려보내게 합니다만 귀족들과의 마찰은 더욱더 극에 달하게 됩니다. 특히 왕비의 행동에 대해서 귀족들은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왕비 역시 자신을 이런식으로 추궁하는 귀족들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로비사 울리카의 오빠였던 프리드리히 2세는 이런 상황에서 여동생이 모욕당했다고 여겼으며 스웨덴 대사를 불러 항의를 했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여동생에게 충고를 하게 됩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자금도 없고 세력도 없는 로비사 울리카에게 "열정을 줄이라"고 충고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로비사 울리카의 열정을 도울수 없다고도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로비사 울리카는 프리드리히 2세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열정대로 일을 실행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