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책을 샀는데 이 책이 뭐랄까 로비사 울리카의 정치적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이라서 정치 이야기만 주구장창나오네요 엉엉엉..ㅠ.ㅠ
[새해특집]통치자이길 원했던 왕비 : 스웨덴의 로비사 울리카 왕비...(16) 스웨덴의 왕태자비 : 사회적 관계
로비사 울리카는 스웨덴에서 활발한 정치 활동을 했었으며 이것은 그녀가 스웨덴 내에서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로비사 울리카는 프랑스어를 배웠고 당대 스웨덴의 귀족들은 대부분 당대 교양어인 프랑스어를 할줄 알았기에 의사소통에 아주 불편함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로비사 울리카는 프랑스어를 쓰는데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스웨덴어를 배웠으며 이후 공식연설을 스웨덴어로 하는 등의 일을 했었습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문제이기도 했는데 스웨덴어를 쓰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더 잘 얻을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비사 울리카와 남편인 아돌프 프레드릭은 나쁘지 않은 관계로 시작합니다. 로비사 울리카는 아름답다는 평가였으며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의 로비사 울리카에 대해서 아돌프 프레드릭은 나쁘지 않게 여겼습니다. 이것은 로비사 울리카가 남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도록 했으며 남편이 중립적인 성향을 버리고 하타르나에 더 가깝게 지내도록 할수 있게 만든 원인이 었을 것입니다.
로비사 울리카는 예술과 과학 문학등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비록 스스로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할머니나 어머니 등 모두가 과학과 예술등에 관심이 많았던 하노버 가문 출신이었으며 로비사 울리카 역시 이런 분위기에서 자랐었습니다. 그렇기에 스웨덴에서 로비사 울리카는 예술분야등에 대한 활동을 합니다. 스웨덴에서 도서관을 세우고 왕립학회에 편지를 보내는 등의 일을 했었습니다. 특히 로비사 울리카는 프랑스식을 좋아했으며 아마추어 극단을 조직해서 자신의 거처등에서 프랑스식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었습니다. 사실 당대 프랑스 문화는 전 유럽에 유행하던 것들이었습니다. 유럽의 궁전들은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모델로 지어졌으며 프랑스에서 유행하는 많은 것들이 다른 유럽의 여러 궁정에서도 유행했었습니다. 그랬기에 로비사 울리카가 스웨덴에 프랑스식 연극등을 들여온 것은 어쩌면 당대 유행하던 문화를 스웨덴에도 들여온것이라 여길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후대에 로비사 울리카의 과도한 프랑스식에 대한 선호가 스웨덴의 독자적인 문화의 싹을 없애버렸다고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로비사 울리카의 아마추어 극들은 로비사 울리카 주변의 여성들이 함께 했었는데 이런 여성들은 주로 로비사 울리카가 지지하던 하타르나에 속한 가문의 여성들이었습니다. 특히 로비사 울리카는 자신의 시녀들이 된 여성들을 무척이나 좋아했었고 이들은 로비사 울리카와 함께 궁정에서 연극을 하는 등의 일을 했었습니다. 헨리카 율리아나 폰 리벤, 카타리나카를로타 드 라 가르디,샤를로테 스파레, 울리카 스트룀펠트,아젠타 스트룀펠트등이 로비사 울리사 울리카의 첫 시녀로 일을 했는데 이들은 스웨덴의 유력한 귀족 가문 사람들로 로비사 울리카가 정치적인 활동을 하는데 큰 힘이 되는 인물들이기도 했었습니다.
로비사 울리카는 국왕인 프레드릭 1세와 다정한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국왕이었기에 당연히 존중은 해주었지만 프레드릭 1세의 사생활은 로비사 울리카에게 껄끄러운 일이었습니다. 프레드릭 1세에게는 오랜 정부였던 헤드빅 타우베가 있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여러명의 아이들을 낳았었습니다. 왕비는 없었지만 국왕의 공식 정부나 다름 없었던 헤드빅 타우베의 지위는 애매한 것이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헤드빅 타우베는 로비사 울리카가 결혼하기 직전 막내아이를 낳다가 사망했기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더 큰 문제는 프레드릭 1세가 헤드빅 타우베가 죽고 난뒤 만난 새로운 여성이었습니다. 카타리나 에바 호른이라는 여성으로 프레드릭 1세는 그녀에게 반해버렸고 호른은 국왕에게 결혼할것을 요구했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귀천상혼 가까운 결혼을 하기로 약속하기까지 했는데 이것은 정치적으로 큰 문제였습니다. 로비사 울리카의 입장에서는 국왕의 정식아내라는 존재는 궁정에서 껄끄러울수밖에 없었습니다. 카타리나 호른은 결국 국왕의 정부가 되었는데 카타리나 호른 역시 자신의 주변 인물들에게 이익을 부여하는 등의 행동을 했고 이것은 로비사 울리카와 마찰을 빚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로비사 울리카와 프레드릭 1세와의 관게는 더욱더 의례적 관계가 되었습니다만, 로비사 울리카는 국왕에 대한 예의를 잊지는 않았었으며 결국 1748년 카타리나 호른이 국왕과 헤어져서 궁정을 떠나면서 껄끄러웠던 관계는 정리됩니다.
로비사 울리카는 스웨덴에서 초기에는 정치적으로 꽤나 성공적이었습니다.특히 로비사 울리카는 스웨덴의 러시아와 영국에 대한 의존을 프랑스와 프로이센과의 관계를 강화하므로 깨었으며 이것은 로비사 울리카의 정치적 영향력을 더욱더 강화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프레드릭 1세가 1748년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난뒤 건강이 더 약해졌으며 이것은 로비사 을리카가 정치적으로 더 영향력을 키울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로비사 울리카에게 불만을 품는 사람이나 같이 함께 했지만 뜻이 맞지 않는 사람들이 나오게 됩니다. 먼저 로비사 울리카에 가장 불만을 품는 사람들은 뫼소르나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뜻에 따라 왕태자비가 된 로비사 울리카가 자신들의 뒤통수를 치는 것에 대해서 엄청나게 불만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로비사 울리카가 함께 하던 사람들 역시 뜻이 달라지게 됩니다. 가장 큰 이유는 하타르나나 뫼소르나 둘다 로비사 울리카가 왕권을 강화해서 절대주의로 가려는 것에 대해서 의심을 하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로비사 울리카가 신뢰하던 테신과의 관계가 벌어지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둘이 관계가 벌어지기 시작하는 결정적 원인은 1750년-1751년 사이에 있었던 아들인 구스타브 아돌프과 덴마크의 소피 마그달레느의 혼담이었을 것입니다. 테신이 주도한 이 협정에서 로비사 울리카는 덴마크 공주를 며느리로 맞을 생각이 없었으며 이를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결혼해야한다면 소피 마그달레느가 스웨덴에서 자라야한다고 주장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테신은 이런 로비사 울리카의 뜻을 완전히 무시했었고 구스타브 아돌프와 덴마크 공주간의 약혼을 성사시켜버립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이제까지 테신을 무한 신뢰했었던 로비사 울리카에게 타격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