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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특집]통치자이길 원했던 왕비 : 스웨덴의 로비사 울리카 왕비..(25) 구스타브 3세와의 갈등 : 쇠데르만란드 공작의 결혼

엘아라 2022. 2. 4.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30편 맞출까요..ㅠ.ㅠ

아마 지금 생각으로는 28편쯤으로 끝날듯합니다만 어떻게 늘려볼까요 --;;;

 

[새해특집]통치자이길 원했던 왕비 : 스웨덴의 로비사 울리카 왕비..(25) 구스타브 3세와의 갈등 : 쇠데르만란드 공작의 결혼

 

로비사 울리카는 1771년 11월 딸인 소피아 알베르티나와 그외 몇몇 조신들을 데리고 프로이센으로 가기로 결정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껄끄러워진 아들과의 관계를 잠시 식히고 또 프로이센으로 가서 아들에게 도움을 줄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려는 것일듯합니다. 로비사 울리카는 아마도 아들이 자신의 뜻을 따르거나 적어도 자신의 조언을 받아들여야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로비사 울리카의 눈에는 아들은 아직 미숙한 존재였으며 노련한 자신이 아들을 떠받혀야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냥은 아니었고 그녀의 배경 세력이었던 프로이센의 존재를 강하게 인식시키려했었으며 이때문에 프로이센을 방문했던 것일듯합니다. 

이 계획은 구스타브 3세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았는데 어머니의 간섭을 어느정도 배제하고 자신의 뜻대로 스웨덴 내 정치를 진행할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로비사 울리카의 측근이 로비사 울리카에게 늘 보고를 했으며 로비사 울리카는 스웨덴 내 상황을 잘 알수 있었습니다만, 멀리 떨어져있었기에 바로 손을 쓸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것입니다.

 

소피아 알베르티나, 로비사 울리카의 딸

 

로비사 울리카는 스웨덴을 떠나있는 동안 아들이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수입이 될 개인 영지 같은 것도 부여하지 않으려하고 자신의 여러가지 사업에 반대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화를 내게됩니다. 하지만 멀리 있었기에 어쩔수없었습니다. 로비사 울리카는 아들에게 어느정도 화가났었지만 1772년 스웨덴으로 돌아오는 길에 로비사 울리카의 상황을 완전히 바꾸는 일이 일어납니다. 바로 1772년 구스타브 3세가 의회에 대해서 쿠데타를 일으켜서 성공을 했던 것입니다. 

 

구스타브 3세는  1772년 8월 쿠데타를 성공시켰으며 곧 그의 목표이자 로비사 울리카의 목표였던 왕권을 강화한 헌법을 통과시키게 됩니다. 이 쿠데타는 구스타브 3세와 그의 동생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직접적으로 주도했었는데 어머니인 로비사 울리카는 이 사실을 전혀몰랐었습니다. 하지만 로비사 울리카는 아들들이 자신에게 쿠데타 계획을 말하지 않은 것에대해서 실망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구스타브 3세는 쿠데타와 자신의 정부를 인정받기 위해서 외교적 교섭을 해야했고 여기에 어머니인 로비사 울리카를 내세우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스타브 3세는 이미 프랑스와 비밀조약을 맺었기에프랑스의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러시아와 프로이센을 달래기 위해서 어머니인 로비사 울리카를 포메른 지방의 섭정으로 임명합니다. 이것은 프로이센 쪽이 만족하고 러시아를 달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구스타브 3세는 어머니에게 영지를 부여했고 어머니의 궁정을 꾸려나갈수 있게 했습니다. 로비사 울리카는 이런 대접에 만족했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자신의 뜻을 따를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1772년의 구스타브 3세

 

하지만 구스타브 3세는 어머니의 간섭을 원치는 않았습니다. 그는 스웨덴 정치에서 점차 어머니를 배제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에 대해서 로비사 울리카는 화를 내게 됩니다. 모자간의 불화는 점차 커져가게 되는데 특히 구스타브 3세의 동생인 칼 왕자의 결혼 문제에 대해서 모자는 다시 한번 큰 갈등을 빚게 됩니다. 

 

로비사 울리카는 장남의 결혼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으며 이때문에 둘째아들인 칼의 결혼은 자신의 뜻대로 하고 싶어합니다. 로비사 울리카는 친정 조카를 자신의 아들과 결혼시켜서 스웨덴 내의 프로이센의 입지를 강화시키려했습니다. 대상으로는 가장 친했던 언니인 조피 도로테아의 딸이었던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필리피네나 자신에게 도움이 많이 되었던 형부와 언니 필리피네 샤를로테의 딸이었던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아우구스테 도로테아를 며느리로 삼고 싶어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을 구스타브 3세는 그다지 탐탁치 않아했었습니다. 그는 아마 프로이센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며 이때문에 외가쪽 사촌중 한명과 동생을 결혼시키려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친사쪽 사촌이었던 홀슈타인-고토로프의 헤드비히 엘리자베트를 동생과 결혼시키려합니다. 게다가 칼 역시 외가쪽 사촌보다 친가쪽 사촌에게 더 호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필리피네, 로비사 울리카의 조카

 

이 문제에 대해서 당연히 로비사 울리카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습니다. 국왕인 구스타브 3세나 결혼 당사자인 칼 모두 외가쪽 사촌과 연결되길 원하지 않았지만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바로 말하지 않습니다. 아마 남편이 죽은뒤 더욱더 사람들에게 화를 잘 내게 된 로비사 울리카가 아들들이 자신의 뜻을 거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더 화를 낼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구스타브 3세는 의회의 핑계를 대면서 일단 결혼에 대해서 무마를 했습니다만 1772년 쿠데타 이후 이런 핑계를 댈수 없었습니다. 로비사 울리카는 당연히 국왕이 이제 외가쪽 사촌과 동생의 결혼을 허락할것이라 여겼지만 구스타브 3세는 이제 대놓고 이 결혼에 대해서 거부하게 됩니다. 로비사 울리카는 아들이 자신을 점차 정치에서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나고 있었는데 이런 말조차도 듣지 않는 것에 크게 화를 내게 됩니다. 게다가 칼 역시 어머니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더욱더 화가납니다. 

 

하지만 결국 로비사 울리카는 홀슈타인-고토로프의 헤드비히 엘리자베트를 며느리로 받아들여야했습니다. 왜냐하면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가 이 결혼을 지지했었기 때문입니다. 예카테리나 2세 역시 아돌프 프레드릭의 조카로 구스타브 3세와 칼 왕자 그리고 헤드비히 엘리자베트와도 사촌관계였으며 이런 가족간 결합이 좋다고 여겼으며 러시아의 입장을 스웨덴에서 무시할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칼과 헤드비히 엘리자베트는 1774년 6월 21일 결혼식을 올립니다. 헤드비히 엘리자베트는 소극적이었던 첫째며느리보다 좀더 적극적이었으며, 결국 헤드빅 엘리자베트는 시어머니에게 좀더 적극적으로 다가갔으며 로비사 울리카의 병을 간호하거나 로비사 울리카와 가족간의 중재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홀슈타인-고토로프의 헤드비히 엘리자베트, 쇠데르만란드 공작부인

 

이렇게 로비사 울리카는 아들과의 관계가 점차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곧 아들과 거의 관계를 단절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