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30편 할수 있을것같습니다. =-=
[새해특집]통치자이길 원했던 왕비 : 스웨덴의 로비사 울리카 왕비..(26) 문크 사건
구스타브 3세는 결혼 12년만인 1778년 2월 왕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발표하게 됩니다. 이것은 후계자 문제로 골치 아프던 스웨덴에 큰 경사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구스타브 3세와 어머니인 로비사 울리카의 사이를 돌이킬수 없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었습니다.
구스타브 3세는 1766년 덴마크의 공주였던 소피 마그달레느와 결혼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결혼은 정략결혼이었으며 둘 사이는 거의 의례적 관계일뿐이었습니다. 비록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지만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였으며 덴마크인 아내가 정치적으로 자신에게 문제가 될수 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게다가 거의 낯선 사람이었던 아내와 잘 지내야했음에도 그는 아내에게 다정하지 않았었으며 스웨덴에서 소피아 마그달레나로 불린 소피 마그달레느 역시 수줍어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기에 남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결국 부부는 의례적으로만 남았으며 특히 둘은 결혼을 완성하지도 않았다는 이야기가 파다했었습니다. 이것은 정부조차 없던 구스타브 3세가 "여성에게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게 했으며 결국 국왕 부부에게서 아이가 태어날것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만들었습니다.
구스타브 3세 역시 스스로 자녀를 얻을 생각을 하지 않았고 후계자를 얻기 위해서 동생인 칼을 결혼시켰습니다. 활달한 성격의 헤드비히 엘리자베트(헤드빅 엘리자베트)는 사교적이었지만 결국 칼 왕자 부부도 후계자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후계자 문제는 더욱더 심각해지게 되는데, 구스타브 3세의 측근들은 국왕과 왕비 사이에 자녀를 얻도록 해야한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리고 부부사이를 먼저 원만하게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특히 국왕의 시종이었던 아돌프 프레드릭 문크가 등장합니다. 그는 왕비와 국왕 사이에서 가교역할을 해서 부부가 좀더 친밀하게 지내도록 했었습니다. 이때문에 그는 둘의 신임을 얻게 되었으며 왕비의 거처를 자주 드나들게 됩니다.
곧 왕비가 임신하게 되었으며 이런 경사에 나라는 축제 분위기가 됩니다. 하지만 국왕의 동생이었던 칼 왕자는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왕가의 후손을 얻기 위해서 그는 결혼했었지만 자신에게 후계자가 태어나길 기다리지 않고 형이 스스로 후계자를 만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런 배신감은 왕자와 그의 측근들 사이에서 왕비의 임신에 대한 의심을 품게 만들었습니다. 이전에 구스타브 3세는 동성연애자라고 알려질만큼 여성에게 관심이 없었고, 문크는 수시로 왕비의 거처를 드나들었으니 왕비의 아이가 과연 국왕의 아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더 복잡했는데 문크의 역할은 국왕과 왕비의 "성적행동"을 가르쳐주는 역할이었습니다. 구스타브 3세는 성적 문제에 거의 관심이 없었으며 소피아 마그달레나는 경험이 없었기에 부부는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몰랐으며 결국 문크는 침실에서까지 부부사이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소문은 퍼져나갔으며 당연히 로비사 울리카는 이 문제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그리고 칼 왕자와 로비사 울리카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두가지 버전이 있는데 프로이센쪽에서는 칼 왕자가 어머니에게 문크가 왕비의 아이의 아버지라고 강력히 주장했으며 어머니를 설득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반면 스웨덴쪽에서는 로비사 울리카 왕비가 왕비의 아이가 문크의 아이라고 강력히 주장했으며 칼 왕자를 설득했다는 것입니다. 사실이 어떻든 간에 로비사 울리카와 칼 왕자 모두 왕비의 아이가 국왕의 아이가 아니라고 강하게 의심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칼 왕자는 문크를 소환해서 그를 조사하려했고, 구스타브 3세는 이 사실을 알고 어머니를 찾아가서 말다툼을 하게 됩니다. 구스타브 3세는 어머니가 자신과 아내를 이유없이 비방한다고 여겼습니다. 당연히 로비사 울리카는 성격상 아들의 핍박에 더욱더 화를 내게 되었으며 구스타브 3세 역시 어머니에게 지지않으려 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심각한 문제로 그의 후계자의 정통성에 대한 것이었습니다.그것도 그의 어머니가 이런 문제를 제기한다면 설령 아들이 탄생한다고 해도 그의 후계자 지위는 치명적일수 밖에 없었습니다.
구스타브 3세는 어머니를 포메른으로 추방하려고까지 했었지만, 외삼촌인 프리드리히 2세는 여동생을 확고히 보호했고 조카에게 경고를 했었습니다. 하지만 여동생에게 독일로 돌아오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것은 프리드리히 2세 역시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것이기에 이것을 피해야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물론 로비사 울리카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스톡홀름에 남게 됩니다.
구스타브 3세는 어머니를 추방하지 않았으며 대신 공개적으로 로비사 울리카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합니다. 로비사 울리카는 소문을 들었지만 사실이 아니라는 문서에 서명해야했으며 로비사 울리카 뿐만 아니라 국왕의 동생들 모두와 의원들 역시 이 문서에 서명해야했습니다.
1778년 11월 1일 소피아 마그달레나 왕비는 모두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후계자가 될 아들 구스타브 아돌프를 낳았습니다. 모두가 기뻐했으며 사실 로비사 울리카도 손자의 탄생을 기뻐했고 손자에게 줄 선물까지 마련했었습니다. 하지만 로비사 울리카가 손자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서 보낸 편지에 대해서 구스타브 3세는 여전히 어머니가 손자의 출생에 대해서 의심을 품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새로 태어난 손자를 보러오는 것을 거절해버립니다.
로비사 울리카는 이 소식을 듣고 놀라서 아들에게 다시 한번 편지를 보냈습니다만, 다정한 성품이 아니었던 로비사 울리카는 아들을 설득할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구스타브 3세와 로비사 울리카의 관계를 완전히 파괴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늘 참고 있던 소피아 마그달레나 역시 이때 폭발해버리고 맙니다. 늘 자신에게 불친절했던 시어머니가 이제는 자신의 정조와 아들의 출생까지 의심하고 그걸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견딜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소피아 마그달레나는 이후 시어머니와 절대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그것을 지킵니다.
이렇게 로비사 울리카는 아들 구스타브 3세와 완전히 틀어졌으며 또한 정치에서 완전히 멀어지게 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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