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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특집]통치자이길 원했던 왕비 : 스웨덴의 로비사 울리카 왕비...(7) 형제 자매들(두번째)

엘아라 2022. 1. 11.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간단하게 하려고했는데 아홉명을 해야하더라구요. 그래서 두개로 나눌려고 했더니 지난번에 책쓰면서 이집안을 좀 팠더니 왠지 친숙하게 느껴져서 뭔가 말이 많아지는 듯합니다.

그래서 깔끔하세 세명씩 하기로 했습니다.

 

아하하..이렇게 글을 늘리는 것이죠 -0-;;;;;

 

[새해특집]통치자이길 원했던 왕비 : 스웨덴의 로비사 울리카 왕비...(7) 형제 자매들(두번째)

 

루이제 울리케의 셋째 언니는 필리피네 샤를로테입니다. 필리피네 샤를로테는 언니들처럼 큰오빠인 프리드리히 2세를 매우 좋아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프로이센 공주라는 사실과 프로이센 가문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도 했었습니다. 필리피네 샤를로테 역시 가문의 다른 사람들처럼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다고 알려져있습니다.

 

프로이센의 필리피네 샤를로테,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비, 로비사 울리카의 언니

 

필리피네 샤를로테의 결혼은 아버지에 의해서 결정된 전형적인 정략결혼이었습니다. 필리피네 샤를로테의 어머니인 조피 도로테아는 영국쪽 조카들과 자녀들을 결혼시키고 싶어했지만 필리피네 샤를로테의 아버지였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영국쪽과의 연결고리를 좋아하지 않았었습니다. 특히 제국내의 영향력을 고려해서 아들을 황후의 조카와 결혼시키려했었는데 아들이 이를 거부한것도 모자라서 떠나려한것에 큰 분노를 느끼기도 했었습니다. 하여튼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딸인 필리피네 샤를로테를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후계자 였던 카를과 결혼시키게 됩니다. 재미난 것은 이것은 후에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카를이 사촌이었던 마리아 테레지아를 지지하지 않고 매형이자 처남이었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를 지지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습니다.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카를 1세

 

필리피네 샤를로테는 남편과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고 알려져있는데 이것은 언니들과 달리 남편의 정부를 눈감아 주면서 적당한 행복을 추구했기 때문이기도 했었습니다. 둘사이에서는 10명이상의 자녀들이 태어났는데 아들들은 모두 프로이센 군에 복무했었으며 필리피네 샤를로테는 이를 자랑스러워했었습니다. 

 

필리피네 샤를로테와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카를 1세와 자녀들

 

루이제 울리케의 넷째 언니는 어머니의 이름과 같은 조피 도로테아였습니다. 조피 도로테아가 태어났을때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아들을 원하고있었습니다. 장남이 있긴 했지만 아들 하나로는 불안했으며 아들이 더 필요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조피 도로테아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바로 위의 오빠인 루이스 카를 빌헬름이 사망했기에 이런 시각은 더 했을 것입니다. 아들을 바라던 아버지와 위로 언니들이 세명이나 더 있었으며 언니들은 모두 재능이 뛰어난 인물들이라고 알려져있었기에 조피 도로테아는 상대적으로 덜 부각된 인물이기도 했었습니다.

 

프로이센의 조피 도로테아,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마르크그라핀, 로비사 울리카 왕비의 언니

 

조피 도로테아의 결혼 역시 정략결혼이었는데 상대는 19살이나 더 많았던 오촌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프리드리히 빌헬름이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손자로 조피 도로테아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사촌이었습니다. 그는 프로이센 왕가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가문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서 딸을 사촌과 결혼시켰던 것입니다. 

 

조피 도로테아의 결혼은 매우 불행했는데, 조피 도로테아의 남편인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매우 급한 성격에 잔혹한 인물로 "미친 마르크그라프"라는 별명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당연히 결혼 생활은 매우 불행했었는데 조피 도로테아는 잔혹한 남편을 피해서 오빠인 프리드리히 2세의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었으며 둘은 거의 따로 살았었습니다.

 

조피 도로테아와 남편인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조피 도로테아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다섯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세딸만 성인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아마도 조피 도로테아에게 더 힘든 삶을 살게 했을 것입니다. 살리카법을 따르던 독일에서 "남성후계자"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으며 이때문에 후계자가 될 아들이 없는 것은 조피 도로테아의 남편이 아내에게 큰 불만을 품는 원인중 하나였을 것이며 아내를 더욱더 가혹하게 대했을 것입니다.  재미난 점은 조피 도로테아의 장녀로 "도로테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프레데리케 조피 도로테아는 뷔르템베르크 공작과 결혼했는데 도로테아의 아들인 뷔르템베르크의 프리드리히는 매우 잔인한 성품에 아내나 주변인물들을 학대했던 인물이었는데 이런 그의 성품은 외할아버지를 닮았다고 알려져있기도 합니다. 조피 도로테아의 둘째딸인 루이제는 외삼촌인 프로이센의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와 결혼했었습니다.그리고 루이제 울리케가 오래도록 며느리 삼고 싶어했던 조카였던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필리피네는 바로 이 조피 도로테아의 막내딸이었습니다.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필리피네, 루이제 울리케의 조카

 

루이제 울리케의 첫번째 남동생은 아우구스트 빌헬름이었습니다. 아마 다른 아들을 기다리고 기다렸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이 아들이 태어난 것을 매우 좋아했을 것입니다. 형인 프리드리히 2세와 10살가량 차이났던 아우구스트 빌헬름은 아버지의 사랑받는 아들이었습니다. 특히 프리드리히 2세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갈등을 빚고 장남을 왕위계승자지위에서 쫓아낼생각까지 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당연히 아직 어려서 말 잘듣던 둘째아들을 매우 예뻐했었습니다. 아우구스트 빌헬름은 다른 형제들처럼 군인으로 성장했는데 그 역시 괜찮은 군인이었으며 이것은 아버지의 마음에 더 드는 아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프리드리히 2세가 동생인 아우구스트 빌헬름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며 후계자가 없었기에 동생을 자신의 후계자로 선택하긴 했었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이 동생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트 빌헬름 역시 자신에 대해서 호의적이지 않은 형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었습니다. 

프로이센의 아우구스트 빌헬름, 루이제 울리케의 남동생

아우구스트 빌헬름은 누나의 시누이이자 형수의 여동생이었던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루이제와 결혼했었습니다. 이것은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과 프로이센과의 연결고리를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둘이 결혼한 때가 1742년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적대적이 되었던 프리드리히 2세가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이런 혼담을 추진했을 것입니다.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루이제, 프로이센의 왕자비,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어머니

 

아우구스트 빌헬름은 형인 프리드리히 2세보다 먼저 죽었으며, 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백부인 프리드리히 2세의 뒤를 이어서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되었습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로비사 울리카의 조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