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뭐랄까 글이 집중이 안되네요..ㅠ.ㅠ
[새해특집]통치자이길 원했던 왕비 : 스웨덴의 로비사 울리카 왕비...(5) 부모
루이제 울리케의 부모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였습니다. 둘은 서로 사촌간이었는데 당대에는 결혼하기에 서로에게 괜찮은 상대로 여겨졌었습니다.
루이제 울리케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프로이센의 첫번째 국왕이었던 프리드리히 1세와 그의 두번째 아내인 하노버의 조피 샤를로테의 외아들이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부모 특히 어머니였던 조피 샤를로테는 매우 자연과학과 예술에 조예가 깊었었으며 철학자들과 교류했다고 알려진 어머니 팔츠의 조피를 닮았었으며 조피는 딸에 대해서 매우 자랑스러워했었습니다. 이런 그녀는 프로이센의 왕비가 되었으며 남편과 함께 프로이센의 궁정에서 예술과 과학등에 집중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프로이센의 재정 문제에 영향을 줬었으며 조피 샤를로테에 대해서 불만을 품는 인물들 역시 존재했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부모와 달리 예술보다는 군대에 집중한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프로이센 내의 재정문제에 민감하게 생각했었으며 부모의 호사스러운 생활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으며 비록 아버지가 못마땅했지만 아버지의 호화로운 생활을 막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은 아들인 프리드리히가 아버지처럼 예술에 심취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아들에 대해서 억압적 태도를 취한 것의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루이제 울리케의 어머니인 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는 하노버의 선제후이자 후에 영국의 국왕이 되는 조지 1세와 그의 아내인 첼레의 조피 도로테아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첼레의 조피 도로테아는 큰 스캔들을 일으키면서 조지 1세와 헤어졌는데 부모가 헤어졌을때 조피 도로테아는 겨우 7살이었으며 할머니인 팔츠의 조피가 조피 도로테아와 그녀의 오빠인 조지 2세를 돌봤었습니다. 재미난 것은 조피 도로테아는 어린시절 외가에서 자주 머물렀던 사촌 프리드리히 빌헬름을 자주 만났었다고 합니다. 이들 둘은 서로 성격이 달랐고 이때문에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사촌에게 과도한 행동을 했었으며 조피 도로테아는 사촌에게 무관심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둘이 성장하면서 혼담이 오가게 됩니다. 왕가의 사람들은 결혼을 마음대로 결정할수 없었습니다. 사실 조피 도로테아의 경우도 부모의 상황과 비슷했었습니다. 전혀 관심없던 사촌과 정치적 목적으로 결혼해야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것입니다. 조피 도로테아의 어머니는 이런 상황에서 화를 냈으며 남편과의 관계도 원만히 하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조피 도로테아는 할머니인 팔츠의 조피의 손에 컸으며 팔츠의 조피는 손녀에게 아마 자신처럼 행동하도록 교육했었으며 조피 도로테아 역시 할머니와 비슷한 삶을 살게 됩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조피 도로테아는 서로 성격이 전혀 달랐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군대에 집중하고 행정적인 문제에 집중한 사람인 반면 조피 도로테아는 가문의 다른 사람들처럼 예술과 문화를 사랑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아내를 사치하려는 사람으로 받아들였으며 조피 도로테아는 그가 거칠고 무례한 인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했었으며 부부는 서로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었습니다. 하지만 둘의 결혼은 정치적인 문제가 연결되어있었으며 이것은 부부가 서로에게 어느정도 양보해야하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특히 조피 도로테아는 어머니가 스캔들로 이혼했었는데 자신마저 남편과 헤어질 경우 많이 곤란한 상황이라는 것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피 도로테아의 할머니였던 팔츠의 조피 역시 이 결혼을 지지했었기에 아마 조피 도로테아에게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도록 충고했을 것입니다.
결국 부부는 서로에게 불만이 있긴 했지만 함께 했으며 둘 사이에서는 열네명의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여전히 남편은 아내에게 불만을 품었으며 특히 정치적에 참여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배제했었으며 아내 역시 남편의 거친면을 싫어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중요한 상황에 맞닥들였을때 서로에 대한 신뢰를 보여줍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병을 앓자 조피 도로테아는 남편을 헌신적으로 간호했었으며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아내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싫어하고 평소에는 아내를 배제하려했음에도 자신이 섭정이 필요한 시기가 왔을때 아내를 섭정으로 선택하려했었습니다.
부부는 아마도 오래도록 함께 지내면서 많은 아이들을 낳고 적당한 신뢰를 서로 쌓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 부부의 관계에 치명적인 된 사건은 바로 영국과의 혼담과 아들 프리드리히의 문제였을 것입니다. 조피 도로테아는 자신을 닮아서 예술을 사랑하는 아들 프리드리히를 매우 아꼈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프리드리히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었습니다. 특히 자식들의 결혼문제에 대해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합스부르크 가와의 연결고리를 강화하기 위해서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쪽과의 결혼을 지지했었지만 조피 도로테아는 친정인 영국 왕가의 결혼을 지지했었습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역시 어머니의 뜻을 지지했었으며 심지어 아버지의 뜻을 거부하고 영국으로 도망갈 궁리까지 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결국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아들에 대해서 매우 가혹하게 대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고,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이렇게 가혹하게 대하는 남편에 대해서 조피 도로테아는 당연히 불만을 가질수 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조피 도로테아는 여전히 영국과의 혼담을 계속해서 추진했었고 남편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이를 강력히 반대했었습니다. 계속된 남편의 거부와 조피 도로테아의 고집은 부부사이는 물론 자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죽을때까지 가부장으로써 아내와 자녀들에게 군림했었으며, 조피 도로테아 역시 이를 받아들이고 순종해야했었습니다. 하지만 조피 도로테아 역시 남편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래도록 조카와 자신의 자녀들간의 혼담을 추진했었습니다. 조피 도로테아는 계속된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시도를 했었습니다. 루이제 울리케가 스웨덴에서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계속해서 여러가지를 시도한 것은 기본적으로 아버지가 추진한 정치 체제에 대한 강한 영향을 받은 것은 물론 역시 어머니를 닮은 면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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