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후훗..호엔촐레른 가문을 열심히 파다가 머리 깨지는줄 알았습니다.=-=
[새해특집]통치자이길 원했던 왕비 : 스웨덴의 로비사 울리카 왕비(2) 호엔촐레른 가문
스웨덴의 로비사 울리카 왕비는 원래 프로이센의 루이제 울리케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루이제 울리케는 프로이센의 공주였으며 프로이센 왕국을 통치하던 가문은 호엔촐레른 가문으로 루이제 울리케 역시 호엔촐레른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호엔촐레른 가문은 11세기경 촐레른 지역을 통치했던 부크하르트 1세로부터 출발한 가문입니다. 특히 이 가문은 13세기에 호엔촐레른 성을 가문의 성으로 삼고 통치했었는데 이후 이 가문 사람들은 "호엔촐레른"이라는 성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가문이 성장하게 된 계기는 13세기 촐레른 백작 프리드리히 3세가 뉘른부르크의 부르크그라프의 상속녀와 결혼하면서부터였습니다. 프리드리히 3세는 당시 황제 가문이었던 호엔슈타우펜 가문에 충성을 하고 있었으며, 당연히 황제는 그를 중요시여겼습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3세의 장인이 죽자 그가 뉘른부르크의 부르크그라프 지위를 상속받는 것을 인정해줬으며 이렇게 프리드리히 3세는 뉘른부르크의 부르크그라프 프리드리히 1세가 되었습니다.
프리드리히 1세가 뉘른부르크의 부르크그라프가 된것은 매우 중요한 상황이었습니다. 뉘른부르크는 중세시대 제국내에서 중요한 경제적 정치적 중심지중에 하나였습니다. 이런 뉘른부르크 주변 지역을 통치하면서 뉘른부르크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은 인물이 바로 뉘른부르크의 부르크그라프였기에 호엔촐레른 가문이 이 뉘른부르크의 부르크그라프 지위를 얻은 것은 제국 내에서 지위를 높일수 있는 좋은 바탕이 됩니다. 이후 프리드리히 1세의 두 아들들은 뉘른부르크쪽과 촐레른쪽으로 영지를 나누게 되는데 촐레른쪽 영지를 물려받은 사람들은 후에 호엔촐레른 가문의 가톨릭 분가를 형성합니다. 촐레른쪽 영지를 상속받은 분가는 점차 세력이 약해지게 되지만 뉘른부르크쪽의 영지를 상속받은 이들은 점차 가문의 영지를 확보해나가면서 세력을 확장하게 됩니다.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이었던 콘라트는 뉘른부르크쪽 영지를 상속받았으며 그의 후손들은 인근 영지들을 점차 더 편입하면서 세력을 확장했었습니다. 하지만 호엔촐레른 가문이 제국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게 된 계기가 된것은 14세가 뉘른부르크의 부르크그라프였던 프리드리히 6세때였습니다. 프리드리히 6세는 복잡한 상황내에서 룩셈부르크 가문 출신이었던 지기스문트를 황제로 지지했었습니다. 이에 지기스문트는 프리드리히 6세에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을 줬으며 지기스문트가 성공적으로 황제가 되면서 프리드리히 6세 역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지위를 확고히 인정받았고 가문은 이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지위를 가지는 브란덴부르크의 마르크그라프령을 상속받게 됩니다.
호엔촐레른 가문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을 얻은뒤 가문은 또하나의 중요한 영지를 얻게 됩니다. 바로 프로이센 공작령이었습니다. 프로이센 지역은 복잡한 사정이 있었는데 원래 튜턴기사단이 확보한 지역으로 신성로마제국의 지역이라기 보다는 더 외부의 지역이었으며 폴란드 국왕이 이 지역에 대한 주종권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폴란드 국왕과 튜턴기사단은 서로 갈등을 빚고 있었습니다. 이후 폴란드 공주의 아들로 호엔촐레른 가문 출신이었던 알브레히트는 원래 성직자가 될 예정이었고 이에 폴란드 국왕은 자신의 조카를 튜던 기사단장으로 지지합니다. 이렇게 알브레히트는 튜턴기사단장으로 프로이센 지역을 통치하지만 폴란드와의 마찰은 여전했었습니다. 그는 교황이나 다른 가톨릭 세력에게 도움을 받길 원했지만 거절당했고, 도리어 루터의 측근으로부터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런 정치적 상황과 종교적 상황은 결국 알브레히트가 세속화된 프로이센의 통치자로 인정받는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알브레히트는 개신교로 개종했으며 외삼촌인 폴란드 국왕으로부터 프로이센 공작령의 통치자로 인정받았고 프로이센 공작은 폴란드 국왕의 봉신으로 남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호엔촐레른 가문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과 프로이센 공작령 두개의 중요한 영지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지들은 사실 각각 분가들이 통치하는 것이었으며 심지어 하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봉토였으며 또하나는 폴란드 국왕의 봉토였기에 같은 가문의 영지라도 큰 접점이 없을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복잡한 여러가지 요인은 두개를 하나로 묶어서 프로이센 왕국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먼저 프로이센 공작령의 상속문제가 발생합니다. 첫번째 공작 알브레히트는 아들이 있었지만 그 아들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딸들만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프로이센 공작령이 상속문제가 발생하는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들은 폴란드와의 결속을 강화했었으며 이때문에 프로이센 공작령이 가문의 손을 떠나지 않게 막을수 있었습니다. 특히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후계자였던 요한 지기스문트는 프로이센 공작의 장녀였던 안나와 결혼했고 결국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인 요한 지기스문트는 장인이 죽은뒤 프로이센 공작령도 물려받았으며 이후 요한 지기스문트와 안나의 후손들은 이 두개의 영지를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두개의 영지가 합쳐질수 있게된 가장 중요한 계기는 바로 30년 전쟁이었습니다. 요한 지기스문트와 안나의 아들인 게오르그 빌헬름은 아버지로부터 두개의 영지를 모두 상속받았습니다. 하지만 30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는 애매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중립을 유지하길 원했지만 이런 그의 상황은 그의 영지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이 전쟁터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처남이자 개신교측의 중요한 인물이었던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에 대해서 지지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황제가 그를 용서한것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제국군에 의해서 그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을 점령당했으며 프로이센 공작령으로 피신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게오르그 빌헬름의 아들로 "대선제후"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는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군인이자 정치가로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이 점령당하는 것을 봤던 그는 자신의 영지내에서 강력한 군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강한 군대를 마련했으며 이것은 훗날 프로이센 왕국 강한 군사력의 바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황페화된 브란덴부르크 지역을 개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었으며 게다가 이미 가문의 중요한 영지로 자리잡은 프로이센 지역에 대한 개편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두 지역에 대해서 공통된 통치 시스템을 도입하려했고 이것은 결국 두 지역이 하나로 묶이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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