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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특집]통치자이길 원했던 왕비 : 스웨덴의 로비사 울리카 왕비...(6) 형제 자매들(첫번째)

엘아라 2022. 1. 10.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보통은 형제자매들 바로 안하는데 이 집안은 애들이 많아서 말입니다. 게다가 오빠가 프리드리히 대왕이라서...-0-;;;

하여튼 형제 자매들 이야기도 해볼까합니다.

 

......네 글이 안써져서 막 늘리고 있어요..엉엉엉..ㅠ.ㅠ

 

[새해특집]통치자이길 원했던 왕비 : 스웨덴의 로비사 울리카 왕비...(6) 형제 자매들 (첫번째)

 

루이제 울리케의 부모는 14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중 어린시절 사망한 4명을 제외하고는 10명의 자녀들이 성인으로 성장했었습니다. 재미난 것은 루이제 울리케의 어머니인 조피 도로테아는 첫아이를 낳은뒤 의사가 그녀가 더이상 아이를 낳기 힘들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첫아이이자 후계자가 될 아들이 사망한뒤 조피 도로테아가 더이상 아이를 낳지 못할것이기에 그녀의 지위를 유지하기 어려울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피 도로테아는 이후 13명의 아이를 더 낳았었습니다. 

 

루이제 울리케의 살아남은 형제 자매들중 큰 첫째는 언니인 빌헬미네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프레데리케 조피 빌헬미네였습니다. 빌헬미네는 아마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다른 하노버 선제후 가문 사람들처럼 지적이었으며 예술에 관심이 많았었습니다. 이런 그녀의 성향은 어머니와 남동생인 프리드리히와 매우 가까운 사이로 남을수 있었을 것입니다만, 빌헬미네의 삶은 강압적이었으며 가부장적인 아버지에 의해서 결정되었습니다. 빌헬미네의 부모는 자녀의 결혼문제로 다툼을 벌였는데 특히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아내가 자녀들을 영국쪽 조카들과 결혼시키는 것에 부정적이었습니다. 아마 그는 아내가 딸을 영국으로 시집보낼려는 계획에 반대하고 대신 가문의 연결고리를 강화시키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빌헬미네를 호엔촐레른 가문의 분가인 브란덴부르크-바이로트 가문으로 시집보냈었습니다. 

 

프로이센의 빌헬미네, 브란덴부르크-바이로트의 마르크그라핀, 로비사 울리카의 큰언니

 

빌헬미네의 결혼생활은 불행했는데 빌헬미네는 일단 바이로트의 궁정이 너무나 문화적으로 뒤쳐져있다고 여겼었습니다. 게다가 시아버지는 남편을 정치에서 배제했었기에 이런 상황은 빌헬미네가 이해할수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남편과의 관계도 좋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행복했지만 곧 빌헬미네는 남편과의 사이가 멀어지게 되는데 가장 큰 이유는 빌헬미네의 남편인 바이로트의 프리드리히가 빌헬미네의 시녀를 공식 정부로 삼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빌헬미네에게 큰 상처가 되는 것을 것입니다. 빌헬미네는 남편이 바이로트의 마르크그라프가 된후 남편과 함께 바이로트의 여러 문화적 예술적 사업을 지원했고 이것은 바이로트가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될수 있었던 중요한 바탕이 되었습니다. 빌헬미네는 남편보다 먼저 사망했습니다.

 

브란덴부르크-바이로트의 프리드리히, 로비사 울리카의 형부

 

빌헬미네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딸 하나만이 살아남았습니다. 빌헬미네의 딸이었던 브란덴부르크-바이로트의 엘리자베트 프레데리케 조피는 당대 독일에서 제일 아름다운 공주로 알려졌으며, 바이로트의 마르크그라프의 외동딸이었기에 매우 교육도 잘 받았으며 이 때문에 좋은 신붓감으로 여겨졌었습니다. 그리고 뷔르템베르크 공작이었던 카를 오이겐과 사랑에 빠져서 결혼했었습니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점차 불행해졌으며 특히 딸이 죽은후 부부사이는 거의 돌이킬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브란덴부르크-바이로트의 엘리자베트 프레데리케 조피, 뷔르템베르크 공작부인, 로비사 울리카의 조카

 

루이제 울리케의 큰오빠는 바로 프리드리히 대왕으로 알려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였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어머니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으며 이때문에 어머니처럼 영국쪽 사촌과의 혼담을 원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황제와의 연결고리를 강화하기 위해서 황후의 조카였던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와 결혼시키길 바랬었습니다. 결국 프리드리히는 이미 강압적인 아버지를 견딜수 없었는데 결혼 문제마저 강압하자 견디지 못하고 영국으로 도망가려다가 붙잡혔습니다. 이 사건으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장남에게서 왕위계승자 지위를 뺏아버리고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중재로 프리드리히는 지위를 유지할수 있었으며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서 결혼했고 그 이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아들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덜 할수 있었습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프리드리히 대왕", 로비사 울리카의 오빠

 

프리드리히 2세는 아버지가 죽은뒤 합스부르크 가문과 마리아 테레지아와 적극적으로 적대관계가 됩니다. 특히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에서 프리드리히 2세가 슐레지엔을 장악한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리드리히 2세를 주적으로 여겼으며, 프리드리히 2세 마리아 테레지아를 주적으로 여겼는데 특히 7년전쟁이후 수세에 몰렸었던 프리드리히 2세는 더이상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피했지만 여전히 적대감을 감출수 없었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와 결혼했는데 동생 둘이 또한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의 동생들과 결혼했었기에 프로이센과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가문과의 연결고리가 매우 강화되었습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2세와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의 관계는 의례적 관계로 남았으며 둘 사이에서는 후손이 없었고, 왕위는 프리드리히 2세의 동생과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의 여동생의 아들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물려받게 됩니다.

 

 

브라운슞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프로이센의 왕비

 

루이제 울리케의 둘째 언니는 프레데리케 루이제였습니다. 프레데리케 루이제는 어린시절부터 부모가 예뻐한 딸이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프레데리케 루이제가 태어나기 직전에 딸인 샤를로테 알베르티네를 잃었고 이 딸을 잃은 부모가 새로운 딸을 얻었기에 더 예뻐했었습니다. 프레데리케 루이제의 언니였던 빌헬미네는 동생에 대해서 약간은 질투어린 시선으로 동생의 단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아름다웠으며 가문의 다른 사람들처럼 재능있는 사람이기도 했었습니다. 

 

프로이센의 프레데리케 루이제,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마르크그라핀, 로비사 울리카의 언니

 

프레데리케 루이제는 호엔촐레른 가문의 분가였던 브란덴부르크-안스바르의 카를 빌헬름 프리드리히와 결혼했습니다.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는 오래도록 프로이센 왕가의 영향을 받았었습니다. 그렇기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이 영향력을 지속하길 원했었습니다. 프레데리케 루이제의 남편은 미성년으로 아버지에게서 영지를 이어받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섭정으로 일하면서 아들의 정치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프로이센 공주를 며느리로 얻길 바랬고 이를 성사 시켰습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프레데리케 루이제의 남편은 조지 2세의 왕비였던 안스바흐의 카롤리네(캐롤라인 왕비)의 조카였습니다. 프레데리케 루이제의 어머니인 조피 도로테아가 캐롤라인 왕비의 자녀들과 자신의 자녀들을 결혼시키고 싶어했었는데 이렇게 연결고리가 생기게 되죠.

 

안스바흐의 카를 빌헬름 프리드리히와 프로이센의 프레데리케 루이제의 결혼

 

프레데리케 루이제와 칼 빌헬름 프리드리히는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을 했습니다. 결혼하자마자 프레데리케 루이제는 아팠는데 신혼에 아내가 아팠음에도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아내에게 충실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은 프레데리케 루이제가 결혼후 오래도록 후계자를 낳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이것은 그녀가 안스바흐에서 입지가 더 좁아지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결혼 4년만에 아들이 태어났고 장남이 태어난 3년후에 둘째아들이 태어나지만 4살때 장남이 사망했는데 아들이 죽은 것에 대해서 프레데리케 루이제가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해서 그렇다고 비난받았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프레데리케 루이제가 가족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원인이 되었으며 결국 남편과 아들을 떠나 자신의 거처에서 은둔 생활을 했었습니다. 남편이 죽은뒤 프레데리케 루이제는 안스바흐로 돌아갔지만 프레데리케 루이제의 아들은 어린시절 자신을 떠난 어머니에 대해서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고 어머니에 대해서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아했으며 어머니를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안스바흐의 알렉산더, 로비사 울리카의 조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