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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통치 가문들...(50) 벨프 가문 : 세번째 볼펜뷔텔 가문 (두번째)

엘아라 2021. 10. 8.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엉엉엉 이건 진짜 어디까지 했는지 기억이 안납니다.

게다가 책쓴다고 여기도 너무 많이 봤더니 사람들이 막 헷갈립니다.

엉엉엉..ㅠ.ㅠ

 

유럽의 통치 가문들...(50) 벨프 가문 : 세번째 볼펜뷔텔 가문 (두번째)

 

18세기초가 되면서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령에 대한 상속 문제가 대두되게 됩니다. 당시 군주였던 안톤 울리히에게는 아들들이 있었습니다만 이 아들들은 모두 남성 후손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안톤 울리히는 계승문제에 대해서 다시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상속권을 가진 조카인 베베른의 페르디난트 알브레히트 2세와 자신의 손녀딸인 안토니에테 아말리를 결혼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결혼을 통해서 가문의 영지가 확실히 페르디난트 알브레히트 2세에게 넘어갈수 있도록 한것일 것입니다.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안토니에테 아말리, 안톤 울리히의 손녀, 페르디난트 알브레히트 2세의 아내

 

안톤 울리히는 1714년 사망했으며 그의 뒤를 이어서 아들이었던 아우구스트 빌헬름이 뒤를 잇습니다. 하지만 그는 세번 결혼했었지만 후손이 없이 1731년 사망했고 그의 뒤를 이어서 동생인 루드비히 루돌프가 볼펜뷔텔공이 됩니다. 그에게도 세명의 딸밖에 없었는데 장녀는 바로 황제 카를 6세와 결혼해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어머니가 되는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였으며 둘째딸은 러시아의 표트르 1세의 아들이었던 알렉세이 표트로비치와 결혼해서 표트르 2세의 어머니가 되는 샤를로테 크리스티네였으며 막내딸은 친척이었던 베베른의 페르디난트 알브레히트 2세와 결혼한 안토니에테 아말리였습니다. 그리고 1735년 루드비히 루돌프가 사망한뒤 공령은 그의 사촌이자 사위였던 페르디난트 알브레히트 2세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루드비히 루돌프, 그의 큰딸은 황후였고 둘째딸은 러시아의 황태자비였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외할아버지

 

페르디난트 알브레히트 2세는 비록 정략결혼이었지만 아내인 안토니에테 아말리와 매우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며 둘사이에서는 10명이 넘는 아이들이 태어났습니다. 페르디난트 알브레히트 2세는 처형이 황후였고 이 때문에 장인의 가문처럼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군인으로 일을 했었습니다. 황실과의 연결고리는 그의 자녀들과 프로이센 왕가 사람들이 결혼하는 계기가 됩니다. 프로이센의 국왕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황실과의 연결고리를 강화하기 위해서 페르디난트 알브레히트 2세의 딸로 이모인 황후의 이름을 딴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가 자신의 아들인 프리드리히(프리드리히 2세)와 결혼하길 원했었습니다. 이것은 부자간의 갈등을 극에 달하게 한 일이었지만 결국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프리드리히와 결혼합니다. 뿐만 아니라 페르디난트의 후계자인 아들 카를은 프리드리히 2세의 동생인 프로이센의 필리피네 샤를로트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이 연결고리에 더해서 다시 페르디난트 알브레히트 2세의 딸인 루이제는 프리드리히 2세의 후계자였던 동생 빌헬름 아우구스트와 결혼했으며 루이제의 아들이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됩니다. 아마도 이런 연결고리는 막내딸인 율리아네 마리가 덴마크 왕비가 될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페르디난트 알브레히트 2세는 장인의 뒤를 이어서 공작이 되었지만 장인과 같은 해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인 카를이 공령을 이어받았으며 베베른은 동생인 에른스트 페르디난트에게 물려줘서 베베른 가문이 됩니다. 

 

페르디난트 알브레히트 2세

 

페르디난트 알브레히트 2세는 여러 아들들이 있었지만 장남인 카를과 차남인 안톤 울리히를 제외하고는 모두 미혼으로 남았습니다. 차남인 안톤 울리히는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엘리자베트 카타리네 크리스티네와 1733년 결혼하기로 결정했고 1739년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안톤 울리히의 아내는 러시아의 차르인 이반 5세의 외손녀이자 안나 여제의 조카였습니다. 안나 여제가 제위에 올랐을때 과부였으며 이후 결혼하지 않았기에 후계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후계자로 자시느이 조카인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엘리자베트로 결정했으며 1733년 엘리자베트는 러시아로 가서 개종하면서 안나 레오폴도브나(또는 안나 카를로브나)라는 이름으로 살게 됩니다. 안톤 울리히 역시 1733년 러시아로 가서 살기 시작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약혼녀가 러시아의 황위계승자였기에 러시아에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안톤 울리히, 페르디난트 알브레히트 2세의 아들, 러시아의 안나 레오폴도브나의 남편, 이반 6세의 아버지

 

안톤 울리히와 안나 레오폴도브나는 1740년 아들 이반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안나 여제는 자신의 후계자로 안나 레오폴도브나가 아니라 아기인 이반을 지목하고 사망했으며 이 아이는 이반 6세가 됩니다. 하지만 안나 여제의 사촌으로 표트르 대제의 딸이었던 옐리자베트 페트로브나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제위를 뺏았습니다. 옐리자베타 여제는 안톤 울리히와 안나 레오폴도브나 그리고 아기인 이반 6세를 죽이지 않고 멀리 외진곳으로 리가로 유배를 보내버립니다. 그리고 이반 6세는 다시 가족과 떨어져서 다른 곳에 감금당했습니다.

 

이반 6세

 

안톤 울리히와 안나 레오폴도브나는 이후 네명의 아이를 더 낳았으며 안나 레오폴도브나는 1746년 막내인 알렉세이를 낳고서 산욕열로 사망했었습니다. 1762년 옐리자베타 여제가 죽은뒤 안톤 울리히는 고향으로 돌아갈수 있도록 허락받았지만 아이들을 데려갈수 없었기에 그냥 러시아에 머물렀고 결국 1774년 사망합니다. 

안톤 울리히의 아들이었던 이반 6세는 오래도록 살아남았습니다만 예카테리나 2세가 즉위한뒤 반란의 중심이 될 것을 우려해서 결국 살해당하게 됩니다. 안톤 울리히의 나머지 네 자녀들은 1780년 고모이자 덴마크의 왕비였던 율리아네 마리의 중재를 통해서 러시아를 떠나 덴마크로 갈수 있었습니다. 안톤 울리히의 네자녀들은 평생 가택연금상태로 살았기에 덴마크에서도 여전히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이들이 죽을때까지 연금을 지급했었습니다. 

 

안톤 울리히의 4자녀들

 

가계도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