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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통치 가문들...(51) 벨프 가문 : 세번째 볼펜뷔텔 가문 (세번째)

엘아라 2021. 10. 15.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볼펜뷔텔 끝나면 이제 하노버 가문입니다. =-=

사실 하노버 가문은 막판에 수장들이 이름 같은것빼면 그다지 어려울것은 없거든요.

(영국이라서 많이 봤던...)

아마 올해내로 벨프가문 끝나는데 그러면 다음으로는 앨버트 공네 가문인 베틴가문을 해야합니다.

 

....ㅠ.ㅠ 베틴 가문이 말입니다...엉엉엉....

거긴 진짜 더 힘듭니다. ㅠ.ㅠ

 

유럽의 통치 가문들...(51) 벨프 가문 : 세번째 볼펜뷔텔 가문 (세번째)

 

18세기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령의 중심도시는 브라운슈바이크였기에 이후 볼펜뷔텔 공령을 통치하는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들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물론 빈회의 이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령이 정식으로 만들어지게 되지만 그 이전부터 이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으로 알려졌었습니다.

 

1735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볼펜뷔텔 공령을 물려받은 카를 1세는 가문의 외교 정책을 완전히 바꾸게 됩니다. 그는 카를 6세의 황후였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의 조카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이종 사촌이었습니다. 하지만 또 결혼관계를 통해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의 매제이자 처남이었습니다. 이런 관계는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이 일어나면서 카를 1세가 편을 선택해야하는 계기가 됩니다. 1740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황제 카를 6세가 사망합니다. 그 결과 프리드리히 2세와 마리아 테레지아가 상속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속에 대해서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이것은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으로 발전합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익을 위해서 마리아 테레지아를 위협했으며 결국 슐레지엔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후 프리드리히 2세와 프로이센을 적대시하게 됩니다. 

 

카를 1세

 

카를 1세는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에서 난처한 상황이었습니다. 두 가족에게 끼인 상황이었는데 그는 사촌인 마리아 테레지아 보다는 이중 결혼관계로 연결된 프리드리히 2세에게 좀 더 마음이 기울었으며 결국 이것은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에서 그가 소극적으로 행동하게 만들었으며 이후 7년전쟁에서는 프로이센을 지지하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7년 전쟁이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들은 프로이센을 지지하게 됩니다. 

카를 1세의 자녀들은 외가인 프로이센 왕가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었습니다. 카를 1세의 아내인 필리피네 샤를로테는 오빠인 프리드리히 2세를 매우 존경했으며 이런 감정은 그녀의 자녀들에게도 이어지게 됩니다. 또한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의 후계자이자 조카인 프리드리히 빌헬름을 카를 1세의 딸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와 결혼시키기까지 합니다. 물론 이 결혼은 실패로 끝났긴했습니다. 

 

프로이센의 필리피네 샤를로테, 카를 1세의 아내, 프리드리히 대왕의 여동생

 

카를 1세의 아들인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매우 뛰어난 군인으로 외삼촌인 프리드리히 2세의 신임을 받던 장군중 하나였습니다. 그 역시 외삼촌을 존경했었다고 합니다.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영국의 조지 3세의 누나인 오거스타와 결혼했었습니다만 결혼 생활은 그다지 원만하지 못했었습니다. 오거스타는 늘 정부를 두고 있는 남편에 대해서 못마땅해했고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아들들이 자신의 기대에 못미치는 것에 대해서 실망스러워했으며 근친결혼(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의 어머니인 필리피네 샤를로테는 조지 2세의 조카였습니다. 오거스타는 조지 2세의 손녀였구요.) 때문이라고 여겼었습니다.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을때 프로이센의 총사령관이자 대프랑스 동맹의 총사령관이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전쟁에서 나오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바로 이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였습니다.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예나-아우어슈태트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그의 영지는 나폴레옹의 프랑스에 뺏기게 됩니다.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의 막내아들인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군인이되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 형들을 대신해서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카를 2세는 이 막내아들에 대해서도 안심을 하지 못하고 매우 엄격하게 간섭을 했다고 합니다만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군인으로 명성을 날렸던 카를 2세의 명성을 이어받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죽고 영지를 뺏긴뒤 프랑스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에 참전했었습니다. 특히 그와 그의 부대들은 자신의 영지를 뺏긴것에 대한 조의의 표시로 늘 검은 옷을 입고 전장에 나타났기에 "검은 브라운슈바이크"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었다고도 합니다. 그는 워털루 전투 직전의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죽었을때 그에게는 10살 정도밖에 되지 않은 카를과 빌헬름 두 아들만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오래전 아이를 낳다가 사망했으며 이때문에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령을 통치할만한 인물이 없었습니다.  결국 카를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공작이 되었지만 미성년이었고 그의 섭정으로는 고모부였던 영국의 웨일스공 (후에 조지 4세, ...그나저나 마누라랑 극악의 사이면서 처조카의 섭정일은 하셨네요=-=)이 맡게 됩니다. 

카를은 성인이 된후 직접 통치했지만 외교적으로는 물론 내부적으로도 여러가지 마찰을 빚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1830년 혁명이 일어나서 동생인 빌헬름에게 공작 지위를 물려주고 퇴위해야했습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카를

 

형인 카를의 뒤를 이어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된 빌헬름은 형과 달리 정치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공작령이 아닌 자신의 개인 소유지에서 지냈었다고 합니다. 빌헬름과 그의 형인 카를은 모두 결혼하지 않았으며 이때문에 후계자가 될 후손이 없었습니다. 이에 빌헬름은 하노버의 왕태자였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를 후계자로 삼길 원합니다. 이때 이미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가문의 후손은 단절 되었기에 가장 가까운 가문의 남성후손인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의 후손인 하노버 가문의 수장을 후계자로 삼으려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프로이센이 반대를 합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령은 프로이센 중심의 통일을 지지했었지만 하노버는 아니었습니다. 하노버는 오스트리아를 지지했었는데 결국 7주전쟁이후 하노버 왕국은 프로이센에게 합병당했으며 하노버 왕가 사람들은 망명생활을 해야했었습니다. 이때문에 빌헬름이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를 후계자로 삼으려는 것에 프로이센이 반대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빌헬름

 

1884년 공작 빌헬름이 사망하면서 공작가문의 남성 후손이 단절되게 됩니다. 물론 빌헬름은 여전히 하노버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를 자신의 후계자로 여겼으며 프로이센이 거부했기에 공적 재산은 못넘겼지만 사적 재산은 모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에게 넘겼었습니다. 그리고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령의 상속에 대한 문제는 1914년까지도 계속 이어지게 되는데 ,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아들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황제 빌헬름 2세의 딸과 결혼하면서 이것은 해결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 공작령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고, 황제는 사위를 위해서 공작령을 사위가 계승하는 것에 동의했었습니다. 이렇게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령은 다시 한번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가문에게 넘어가게 됩니다만 1차 세계대전이후 독일이 공화국이 되면서 이들 역시 군주의 지위에서 물러나야했었습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에르스트 아우구스트와 그의 아내인 프로이센의 빅토리아 루이제(빌헬름 2세의 고명딸)

 

 

가계도

 

더하기

여기 왜이리 잘아냐구요.

후훗 책쓰느라고 이집안에 대한 책을 미친듯이 읽었습니다 -0-;;;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