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있는글들/금요일 : 유럽의 통치 가문들

유럽의 통치 가문들...(53) 벨프 가문 : 영국 왕가 (두번째)

엘아라 2021. 10. 29.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벨프 가문은 거의 끝나가네요.

그러면 이제는 공포의 베틴 가문입니다. ㅠ.ㅠ

 

유럽의 통치 가문들...(53) 벨프 가문 : 영국 왕가 (두번째)

 

조지 3세의 장남이었던 웨일스 공 조지는 부모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부모는 그에게 실망하게 되는데 그가 한 여성과 사랑에 빠졌고 그녀와 결혼했다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입니다.  조지가 사랑에 빠진 여성은 보통 피츠허버트 부인이라고 불렸던 마리아 스미스였습니다. 그녀는 두번이나 결혼했던 과부였을뿐만 아니라 조지보다 여섯살이나 많은 여성이었습니다.  평민출신에 두번이나 결혼한 과부였으며 또한 조지보다 6살이나 많은것은 왕실에서 좋아하지 않을 모든 요건을 갖췄었습니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피츠허버트 부인이 가톨릭 교도였기에 왕실에서는 도저히 용납할수가 없었습니다. 조지 1세가 왕위에 오를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가톨릭 교도이거나 가톨릭 교도와 결혼하지 않은 영국 왕가의 후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국에서는 법률상 가톨릭 교도나 가톨릭 교도와 결혼하면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하기 때문에 당연히 피츠허버트 부인과 조지가 결혼했다면 조지의 왕위계승권리를 박탈당할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웨일스 공이 이런 행동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왕위에 대한 의무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의 조지 4세, 하노버의 국왕

 

어쨌든 조지와 피츠허버트 부인과의 관계는 크나큰 문제였으며 왕실에서는 서둘러 조지를 결혼시키려합니다. 결혼 상대는 사촌이었던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카롤리네였습니다만 둘은 만나자마자 서로에게 실망했을뿐만 아니라 사이가 극악으로 돌아섰으며 바로 별거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둘 사이에서는 기적적으로 결혼 9개월후에 딸인 샬럿이 태어났으며 샬럿은 조지의 후계자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하지만 샬럿은 1817년 아이를 낳은 뒤 사망합니다. 

 

웨일스의 샬럿, 조지 4세의 딸, 샬럿의 남편은 빅토리아 여왕의 외삼촌이자 후에 벨기에의 국왕이 되는 레오폴 1세였습니다. 

 

샬럿이 죽자 다시 영국 왕위계승문제가 발생합니다. 조지 3세의 아들들은 대부분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없거나 정식결혼하지 않고 정부와 살았으며 왕위계승자가 부족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의회는 조지 3세의 아들들을 서둘러 결혼시켰는데 여기에는 웨일스 공의 동생인 클라렌스 공작 윌리엄과 켄트 공작 에드워드 등이 있었습니다. 캠브리지 공작 역시 이때쯤 결혼했었습니다. 

 

그 결과 1820년 조지 3세가 죽고 조지 4세가 즉위했을때 왕위계승자 순서는 조지 4세의 동생인 요크 공작 프레드릭이 제 1왕위계승자였고 다음 동생인 클라렌스 공작 윌리엄이 제 2 왕위계승자였으며 클라렌스 공작의 딸인 엘리자베스가 제 3왕위계승자였습니다. 그리고 켄트 공작의 딸인 빅토리아가 제 4 왕위계승자였으며 조지 4세의 동생인 컴벌랜드 공작 어니스트 아우구스투스가  제 5왕위계승자였으며 어니스트 아우구스트의 아들인 조지가 제 6왕위계승자였습니다.  제 7왕위계승자는 서섹스 공작 아우구스투스 프레드릭이고 제 8왕위계승자는 캠브리지 공작 아돌푸스고 제 9왕위계승자는 아돌푸스의 아들인 조지 였습니다.  하지만 조지 4세가 죽을 무렵 제 1 왕위계승자는 클라렌스 공작 윌리엄이었으며 제 2왕위계승자는 켄트의 빅토리아 였으며 제 3 왕위계승자는 컴벌랜드 공작이었고 제 4 왕위계승자는 컴벌랜드 공작의 아들인 조지였습니다. 이런 상황은 켄트의 빅토리아가 매우 중요한 왕위계승후보자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형인 조지 4세가 죽은뒤 윌리엄 4세가즉위합니다. 그는 조카인 빅토리아가 자신의 후계자가 될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빅토리아의 숙부이자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컴벌랜드 공작은 당연히 야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때문에 빅토리아의 어머니인 켄트 공작 부인이 딸에 대해서 너무 과보호한 원인도 있었을 것입니다. 

 

영국의 윌리엄 4세, 하노버의 국왕

 

윌리엄 4세는 매우 늙어서 즉위했으며 조카인 빅토리아가 왕위에 오를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제수인 켄트 공작부인과 그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던 존 콘로이를 싫어했으며 빅토리아가 성인이 되어서 섭정이 필요없을때까지 살것이라고 대놓고 이야기하게 됩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1837년 윌리엄 4세는 약속대로 빅토리아가 성인이 된 뒤에 사망했으며 영국의 왕위는 빅토라아에게 돌아갑니다. 하지만 하노버는 여성의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빅토리아의 숙부인 컴벌랜드 공작 어니스트 아우구스투스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빅토리아 여왕이 사촌인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앨버트와 결혼하면서 영국의 왕가는 하노버 가문에서 작센 코부르크 고타 가문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하노버 가문은 하노버 왕가로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컴벌랜드 공작 어니스트 아우구스투스, 하노버의 국왕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