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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통치 가문들...(52) 벨프 가문 : 영국 왕가 (첫번째)

엘아라 2021. 10. 22.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드디어 후훗 영국 왕가네요.

..다음주에 하노버하고 끝낼려고 했더니..영국은 아는 내용이라고 이야기가 점차 길어지네요.

어차피 길어진거 조지 3세 아들들부터 빅토리아 여왕까지는 따로 이야기해볼까합니다. 

 

그런데 오랫만에 가계도를 그린것에 들어갔더니 이게 어떻게 쓰는건지 기억이 안나서 완전 좌절입니다.

다 해놓긴했는데 정렬이 제멋대로라..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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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통치 가문들...(52) 벨프 가문 : 영국 왕가 (첫번째)

 

1714년 하노버의 선제후 게오르그 루드비히는 어머니인 팔츠의 조피의 아들이자 후계자로 앤 여왕의 뒤를 이어서 영국의 국왕 조지 1세로 즉위하게 됩니다. 조지 1세가 영국의 국왕이 되었을때는 벌써 50대였으며 오래도록 군인이자 군주이자 정치가로 살았었습니다. 노련한 정치가였던 조지 1세는 영국에서 국왕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당대 최강국중 하나였으며 그는 이런 최강국의 힘을 손에 넣었습니다. 조지 1세는 자신이 새로 얻은 힘을 대외정책에 사용했었습니다. 사실 조지 1세가 하노버 선제후 시절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을 지지했었기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숙적이었던 프랑스와는 그다지 좋은 관계가 아니었으며 이것은 제임스 2세를 받아들인 프랑스와 영구과의 관계가 애매했던 것과도 연결될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잉글랜드-영국은 오래도록 프랑스와 경쟁관계였으며 이것은 조지 1세가 즉위한 뒤에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지 1세는 영국 내부 정치에 대해서는 좀더 조심스러웠습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에서는 스튜어트 가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이때문에 스튜어트 가문을 복권시키려는 반란이 자주 일어났으며 이것은 조지 1세가 반란은 진압하지만 이들에 대해서 리더들을 제외하고는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계기였을 것입니다. 

 

하노버의 선제후 게오르그 루드비히, 영국의 조지 1세

 

조지 1세는 자신의 유일한 적자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게오르그 아우구스트와 사이가 너무나 나빴습니다. 부자간에 사이가 나빴던 가장 큰 이유는 조지 1세는 게오르그 아우구스트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전처였던 조피 도로테아와 사이가 너무나 나빴기 때문입니다. 둘이 헤어진 가장 큰 이유는 조피 도로테아의 부정때문이었으며, 이 이야기는 전 유럽에 이 이야기가 퍼졌습니다.. 이것은 가부장적 남편이었던 조지 1세가 자신의 명예가 더렵혀졌다고 생각했으며 아내인 조피 도로테아와의 연을 끊은뒤 다시는 그녀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언급조차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아들인 게오르그 아우구스트에게는 가혹한 일이었는데 사랑하는 어머니와 떨어진것도 모자라서 어머니를 만나는 것은 커녕 말조차 꺼내지도 못하게 했기에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커져갔으며 점차 부자간의 불화도 심해지게 됩니다. 

조지 1세가 영국으로 갔을때 아들인 게오르그 아우구스트도 아버지와 함께 영국으로 갔고 영국의 왕위계승자인 웨일스 공이 됩니다. 하지만 부자간의 사이는 점차 더 나빠졌으며 영국의 정치 상황에 따라서 부자간의 사이는 더욱더 벌어지게 됩니다.웨일스 공비의 중재로 부자는 겨우 불화를 잠재우긴했지만 친밀한 관계는 되지 못했었습니다.

 

영국의 조지 2세, 하노버의 선제후

 

조지 1세가 죽은뒤 외아들이었던 조지 2세가 즉위했습니다. 조지 2세는 역시 영국에서 아버지와 비슷하게 통치했었습니다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역시 아버지처럼 아들과 사이가 나빴습니다. 조지 2세는 영국으로 오기전 장남이었던 프리드리히(프레드릭)을 하노버에 두고 왔었습니다. 그는 장남인 프리드리히는 하노버를 상속받길 바랫으며 영국에서 태어난 둘째아들인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이 영국 왕위를 잇길 바랫었습니다. 하지만 하노버 가문은 장자 상속제를 했었으며 영국도 장자상속제를 했기에 당연히 장남인 프레드릭이 반발했고 그는 성장한뒤 부모의 뜻과 반대로 영국으로 왔으며 웨일스 공이 되었습니다. 조지 2세 부부는 프레드릭에 대해서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었는데 결국 이것은 조지 2세가 아버지인 조지 1세와 빚었던 갈등과 비슷한 갈등 상황을 이어가게 됩니다. 

 

웨일스 공 프레드릭, 조지 2세의 아들, 조지 3세의 아버지

 

하지만 조지 2세의 아들인 프레드릭은 아버지보다 미리 사망했으며 조지 2세는 프레드릭의 아들이자 손자였던 조지를 웨일스 공으로 삼았으며 손자손녀들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안타깝게 여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지 2세가 죽은뒤 조지 3세가 국왕으로 즉위합니다. 조지 3세는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샤를로테와 결혼했으며 매우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었으며 많은 아이들이 잇었습니다. 하지만 조지 3세는 가계의 유전병인 포르피린증을 앓고 있었으며 이것은 결국 그가 나이가 들면서 정신 상태가 나빠졌을뿐만 아니라 시력까지 상실하는 원인이 됩니다. 

 

영국의 조지 3세, 하노버의 국왕

 

조지 3세의 아들들은 대부분 제대로 결혼했을 경우에는 아내들과 별거하고 살았으며, 아니면 미혼으로 정부들과 살았었습니다. 이때문에 조지 3세는 아들들이 많았지만 정작 손자 손녀들은 거의 없다시피 했었습니다. 이 때문에 조지 3세의 아들들의 복잡한 사생활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