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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통치 가문들...(54) 벨프 가문 : 하노버 왕가

엘아라 2021. 11. 5.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드디어 벨프가문 끝이네요.

솔직히 예전에 나사우 가문과 팔츠 가문을 정리하고 나서 자신감 가득하게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를 봤다가 울면서 포기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번에 다시 정리해보니 그때 울었던 이유가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자신감을 가지고 베틴 가문을 봤었습니다만..

아하....베틴 가문은 진짜....... 작센 선제후-작센 왕국은 낫습니다만 진짜 작센 공작 가문의 분가들은 눈이 돌아갑니다. -0-;; 다행히 책쓰느라 정리는 좀 되지만 책에는 사람들을 다 안썼거든요. 아하...진짜 가계도 어떻게 그려야할까요. 엉엉엉

 

유럽의 통치 가문들...(54) 벨프 가문 : 하노버 왕가

 

하노버는 영국의 조지 1세가 국왕이 된 후에 영국 국왕들의 개인 영지였습니다. 이것은 하노버와 영국이 하나의 나라로 통합된것은 아니었으며 각각은 서로 다른 나라였으며 군주만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 전쟁이후 하노버는 선제후령에서 왕국이 되었으며 조지 3세는 하노버의 국왕을 겸하게 됩니다.  이후 조지 4세와 윌리엄 4세는 역시 하노버의 국왕을 겸했었습니다. 

 

영국과 하노버가 분리된것은 영국에서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면서였습니다. 영국은 여성의 계승권리를 인정했던 반면 하노버는 여성의 계승권리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하노버의 왕위는 빅토리아 여왕의 숙부인 컴벌랜드 공작 어니스트 아우구스투스가 하노버의 왕위를 물려받게 됩니다. 컴벌랜드 공작은 오래도록 영국 왕위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마도 이것은 여왕이 숙부를 그다지 좋아히지 않은 원인이 되었으며 또한 컴벌랜드 공작이 영국 왕비였던 어머니 샬럿 왕비의 보석들을 다 가지고 가버려서 원한은 더 컸을 것입니다. 

 

하노버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형인 윌리엄 4세가 죽은뒤 하노버의 국왕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된 컴벌랜드 공작은 형들과 달리 사랑하는 여성과 결혼했었습니다. 컴벌랜드 공작이 결혼한 여성은 왕실 기준에 맞는 높은 신분으로 바로 컴벌랜드 공작의 사촌으로 공작의 어머니인 샬럿 왕비의 조카였던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프레데리케였습니다. 하지만 샬럿 왕비는 며느리가 조카였음에도 좋아하지 않았고 아들과의 결혼을 반대했었는데 프레데리케가 스캔들 메이커였기 때문입니다. 프레데리케는 처음에는 형부의 동생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루드비히 카를과 결혼했었는데 둘은 불행했었으며 맞바람을 피웠다고 합니다. 남편이 죽은뒤 프레데리케는 사촌이자 컴벌랜드 공작의 동생이었던 캠브리지 공작과 비공식적으로 약혼했었지만 영국 왕실의 허락을 받지 못했고 약혼은 깨지게 됩니다. 약혼이 깨진 다음해에 프레데리케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으며 둘은 서둘러 결혼했었습니다. 

이후 프레데리케는 사촌인 컴벌랜드 공작을 만나서 사랑에 빠져버렸었습니다. 이때는 여전히 두번째 남편이 살아있을때였습니다만 1814년 프레데리케의 두번째 남편이 죽으면서 이혼히지 않고 컴벌랜드 공작과 결혼할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샬럿 왕비는 이런 스캔들 메이커였던 조카를 며느리로 맞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꼈을 것이며 조카를 며느리로 인정하려하지 않았었습니다.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프레데리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왕비, 언니인 루이제는 프로이센의 왕비였습니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오래도록 영국에서 살았었으며 하노버로 왔기에 많은 이들이 좀더 자유주의적일 것이라 여겼습니다만,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다른 독일의 군주들처럼 보수주의를 선호했었다고 합니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아들인 게오르그 5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하노버의 국왕이 됩니다. 하지만 그는 독일 통일 과정에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중 오스트리아를 지지했었으며 이것은 결국 7주 전쟁이후 하노버가 프로이센에 완전히 합병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게오르그 5세는 왕위를 잃고 망명생활을 해야했었는데 이것은 하노버 가문이 프로이센 가문에 대해서 매우 적대적으로 대하는 원인이 됩니다. 

 

하노버의 게오르그 5세

 

하노버의 왕태자였던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여전히 하노버에 대한 왕위계승권리를 주장했으며 프로이센과 대립하게 됩니다. 특히 친척이었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자신의 후계자로 그를 지목했지만 프로이센이 이를 거부했기에 갈등을 더욱더 심하게 됩니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로 프로이센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덴마크 왕가와 뜻을 같이 했으며  결국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의 딸로 영국 웨일스 공비와 러시아의 황태자비, 그리스 국왕의 동생이었던 덴마크의 티라와 결혼했엇습니다. 

 

하노버의 왕태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프로이센과 하노버간의 갈등은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와 티라의 아들이었던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가 황제 빌헬름 2세의 딸이었던 빅토리아 루이제와 결혼하면서 해결됩니다. 왕태자는 아들을 위해서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령에 대한 계승 권리를 포기했으며 황제는 사위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령의 상속받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이렇게 하노버 가문은 비록 하노버를 되찾을수는 없었지만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령을 상속받으면서 다시 통치가문이 됩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뒤 독일은 공화국이 되었으며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령 역시 공화국이 되었으며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퇴위하고 다시 영지 없는 왕족이 됩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프로이센의 빅토리아 루이제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딸인 프레데리케는 후에 그리스의 국왕인 파블로스와 결혼해서 그리스의 왕비가 되었으며 프레데리케의 딸인 소피아는 에스파냐의 국왕인 후안 카를로스와 결혼했으며 현 에스파냐 국왕인 펠리페 6세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현재 하노버 가문의 수장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빅토리아 루이제의 손자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입니다. 

(...이 가문은 후계자 이름들이 계속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입니다. 국왕이었다면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5세쯤 될까요 --;;; 왜 몇세 이름을 붙이는지 이유를 알듯합니다. 엉엉엉..ㅠ.ㅠ)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