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특집

[새해특집]원대한 꿈을 위한 여정 :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22) 행복한 생활

엘아라 2021. 2. 9.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사실 앞쪽에 그림을 안 넣은 것은 안 넣으려고 안 넣은것이 아니라, 제가 보통은 글을 미리 쫘악 써놓고 그림을 찾아 올리면서 글도 좀 다듬고(..물론 대부분은 그냥넘어갑니다.=--=) 그러거든요.

그런데 글을 19편 쓴 시점에서 상태가 메롱해지는 바람에 그림을 안 넣은거라죠.

..지금 넣으려니까 뭐랄까 김빠지는 느낌이랄까요..ㅠ.ㅠ

아 그러고보니 예전에 헨리 8세의 왕비들도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ㅠ.ㅠ

하여튼 그림을 지금이라도 넣어야할지 고민입니다. -0-;;;

 

[새해특집]원대한 꿈을 위한 여정 :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22) 행복한 생활

 

보스워스 전투가 끝난뒤 레이디 마거릿의 아들인 헨리 튜더가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7세로 즉위하게 됩니다. 이것은 평생 아들을 위해 힘썼던 어머니 레이디 마거릿에게 엄청난 이익이 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레이디 마거릿은 아들이 즉위한뒤 My Lady the King 's Mother 이라는 칭호로 불렸으며 궁정에서 엄청난 특권을 부여받게 됩니다. 

 

헨리 7세

 

레이디 마거릿은 아마도 자신의 독립적 생활을 보장받고 싶어했을 듯합니다. 특히 리처드 3세 통치기 마지막에 사권박탈을 당한뒤 힘들었던 시절이 아마도 그녀에게는 크게 각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비록 중세 여성이어서 남편을 통해서 재산권을 행사해야했었지만, 이전에는 그래도 어느정도 독립적 영주로 지위를 누리고 있었던 이 시기는 매우 큰 굴욕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아들에게 자신의 독립적 생활을 뒷받침해주도록 설득했으며 당연히 헨리 7세는 어머니가 독립적인 경제활동을 할수 있도록 승인을 해줬었습니다. 이것은 레이디 마거릿이 이제 남편인 토마스 스탠리와의 관계를 어느정도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레이디 마거릿과 토마스 스탠리는 여전히 부부로 남았었습니다. 토마스 스탠리는 헨리 7세에 의해서 더비 백작 지위를 얻었으며 레이디 마거릿은 "리치몬드와 더비 백작 부인"이라는 공식 칭호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남편과 이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둘은 서로 독립적으로 살아가기로 결정한것이었죠. 물론 둘은 만났었으며, 레이디 마거릿의 거처에 남편의 방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당대에 매우 특이한 삶이기도 했었습니다. 아마도 정치적 목적으로 결합한 둘이었기에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게 되면서 둘 사이는 자연스럽게 정리한것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물론 둘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으며 아마도 친구같은 관계로 남았을 것이라 추정할수 있을것입니다.

 

토마스 스탠리의 문장

 

레이디 마거릿은 궁정의 다양한 행사에 며느리인 왕비와 함께 참석했었습니다.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정식으로 대관한 왕비였으며 후계자의 어머니였고 남편과의 사이도 좋았으며 시어머니와의 사이도 좋았다고 알려져있습니다. 하지만 며느리 입장에서는 대단한 시어머니가 자주 함께 있는 것에 대해서 어느정도 압박감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레이디 마거릿은 자신의 일로도 바빴기에 아마도 이런 상황은 큰 문제없이 고부관계가 유지되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요크의 엘리자베스

 

레이디 마거릿은 엘리자베스 우드빌에 대해서 관대한 자세를 취했다고 합니다. 사돈이며 어쨌든 도움이 되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일듯합니다. 이때문에 이를테면 며느리가 아이를 낳는 것 같은 중요한 일에서는 늘 엘리자베스 우드빌 역시 레이디 마거릿과 함께 궁정에 왔었다고 합니다. 

 

레이디 마거릿은 요크 가문의 공주들과 다른 귀족 자녀들이나 친척들을 데려다가 돌보기도 했었습니다. 이것은 흔한 일이기도 했었는데 특히 레이디 마거릿은 국왕의 어머니였으며 엄청난 부자였기에 아마도 많은 아이들을 돌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키운 아이들은 레이디 마거릿과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이것은 요크 가문의 공주들이 레이디 마거릿의 친척들과 결혼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요크의 세실, 스태인드 글라스, 레이디 마거릿은 세실을 제일 예뻐했었는데 후에 세실은 레이디 마거릿의 남동생인 존 웰스와 결혼햇었습니다.

 

레이디 마거릿은 나이가 든 후의 초상화만 남아있기에 수수한 옷차림의 엄격한 모습으로 알려져있습니다. 하지만 레이디 마거릿은 젊은 시절부터 패션에 민감했었으며 보석등에도 관심이 많았고 그녀의 거처는 매우 호화로웠다고 합니다. 이미 어린시절부터 대영주였으며 아들이 국왕이 된 뒤에는 왕국에서 최고의 부유한 독립적 여성이었던 레이디 마거릿의 이런 호화롭고 화려한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듯합니다. 

 

헨리 7세와 요크의 엘리자베스가 결혼하고 난뒤 곧 자녀들이 태어납니다. 이것은 레이디 마거릿에게 새로운 왕조가 굳건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죠. 레이디 마거릿은 당연히 손자손녀들에게 관심을 많이 가졌습니다. 며느리가 자녀를 낳을때 늘 관심있게 돌봐줬었으며 손자 손녀들에게 늘 관심을 가지고 있었죠.

 

아서, 레이디 마거릿의 장손, 아서 왕 전설에 따라서 윈체스터에서 태어났으며 이름도 아서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레이디 마거릿은 당연히 후계자가 될 이 손자에 대해서 매우 관심이 많았었습니다.

 

아마 레이디 마거릿이 가장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던 시기는 바로 손자인 아서가 가톨릭 공동 군주의 막내딸인 카타리나(캐서린)과 결혼하기로 한 시점일 듯합니다. 늘 반란에 시달리고 정통성이 문제가 되는 아들에게 대단한 유럽의 군주중 하나인 가톨릭 공동군주가 딸을 결혼시키겠다는 것은 어느정도 인정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것이기도 했기 때문일것입니다. (물론 프랑스 견제가 더 컸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막 생긴 튜더 왕가의 비극은 조금씩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