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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특집]원대한 꿈을 위한 여정 :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21) 보스워스 전투 : 헨리 튜더가 왕위를 얻다

엘아라 2021. 2. 4.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전쟁이야기는 그냥 대충 넘어가야겠습니다.. ㅠ.ㅠ

 

[새해특집]원대한 꿈을 위한 여정 :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21) 보스워스 전투 : 헨리 튜더가 왕위를 얻다

 

레이디 마거릿이 연금되어있는 동안 레이디 마거릿의 아들인 헨리 튜더는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브르타뉴로 돌아갔지만 이때 상황은 매우 복잡하게 됩니다. 헨리 튜더는 브르타뉴 공작의 도움으로 잉글랜드로 갔었습니다만 성공하지 못하고 다시 브르타뉴로 돌아와야했습니다. 이때 브르타뉴 공작은 헨리 튜더보다 리처드 3세가 자신에게 더 도움이 될것이라 여기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미 브르타뉴 공작은 전력이 있었기도 했죠. 이것은 곧 헨리 튜더가 더이상 브르타뉴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헨리 튜더는 당시 프랑스의 섭정이자 샤를 8세의 누나였던 안 드 보주의 호의를 얻을수 있을 것을 기대했고 브르타뉴에서 탈출해서 프랑스 국왕에게로 갔으며 여기서 환영을 받게 되죠.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 그는 헨리 튜더를 보호하기도 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감금하거나 아니면 잉글랜드로 보내려하기도 했었습니다. 프랑수아 2세의 유일한 딸인 안 드 브르타뉴는 브르타뉴 공작령의 상속녀로 후에 프랑스의 국왕들인 샤를 8세와 루이 12세와 결혼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안 드 브르타뉴도 세번결혼했네요 =-=

 

헨리 튜더는 아마 자신의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으리라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잉글랜드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지금은 프랑스 국왕에게 환영을 받을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관계가 좋아진다면 브르타뉴에서와 같은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호의를 얻었을 때 서둘러 프랑스 국왕에게서 병사를 빌어서 다시 한번 잉글랜드로 가려하죠. 이때 헨리 튜더는 숙부인 재스퍼 튜더 외에도 중요한 지지자 한명을 얻게 됩니다. 바로 13대 옥스퍼드 백작이었던 존 드 비어John de Vere였습니다. 그는 랭카스터 가문을 지지하던 가문 출신으로 오래도록 감옥에 갇혀있다가 도망쳤던 인물로 헨리 튜더를 만난 뒤 헨리 튜더에게 충성을 하기로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헨리 튜더, 후에 헨리 7세

 

아들이 착실히 프랑스에서 군대를 모으는 동안 레이디 마거릿은 집에서 안전하게 있었습니다. 리처드 3세는 불안정한 상황이었기에 레이디 마거릿의 남편인 스탠리 경이 자신을 배반할수도 있을 것이라 여겨서 압박을 가하지 않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레이디 마거릿에게 좋은 기회가 되죠. 아마도 그녀는 도리어 남편을 설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스탠리 경은 역시 양쪽 편을 두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레이디 마거릿은 프랑스에 있던 아들 헨리 튜더와 메세지를 주고받을수 있을 정도까지 되죠.

 

1485년 8월 1일 헨리 튜더는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를 떠나 잉글랜드로 향하게 됩니다. 아마도 이때 헨리 튜더는 이 시도가 마지막이라고 여겼을 가능성이 큽니다. 여기서도 성공하지 못한다면 리처드 3세의 지위는 더욱더 확고해질 것이었으며 프랑스의 샤를 8세나 그의 누나이자 섭정인 안이 브르타뉴 공작이 그랬듯이 그를 외면한 가능성이 컸을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섭정이었던 부르봉 공작 부인 안, 안 드 보주, 딸인 수잔과 함께 있는 모습,당대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여성중 한명이었다고 합니다.

 

1485년 8월 7일 헨리 튜더의 군대는 웨일스 지역이었던 펌브로크셔의 밀포드 헤이븐지역에 상륙하게 됩니다. 아마 헨리 튜더가 웨일스에 상륙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지지 기반이 웨일스에 있었기 때문일듯합니다. 비록 랭카스터 가문의 명분을 이어받았다고 하더라도 헨리 튜더는 방계였고 요크 가문 직계인 리처드 3세보다 명분이나 지지세력이 딸릴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웨일스는 달랐죠. 튜더 가문은 웨일스 출신이었으며 헨리 튜더는 웨일스에서 태어나고 자라났었습니다. 이것은 웨일스 사람들이 헨리 튜더에게 호의적인 원인중 하나가 되었으며 웨일스의 많은 이들이 헨리 튜더를 지지하게 됩니다. 

 

헨리 튜더와 그의 웨일스 동맹군이 지나온 상황

 

하지만 헨리 튜더는 다른 지지자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새아버지였던 토마스 스탠리였죠. 리처드 3세는 물론 토마스 스탠리 역시 헨리 튜더가 바다를 건너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토마스 스탠리는 자신의 상속자인 조지를 국왕에게 보내서 자신의 충성심을 확인 시키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가 더욱더 복잡한 상황에 빠지게 되죠.

 

이때 레이디 마거릿은 이게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상황에서 실패하면 아들이나 자신 그리고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죠. 레이디 마거릿은 아들이 성공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런 확신을 가지고 남편을 설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리처드 3세는 스탠리 경이 아내에게 설득당해서 의붓아들을 지지할것이라는 의심을 계속 가지고 있었으며 스탠리 경의 상속자를 인질로 잡고 있었죠. 이런 상황은 토마스 스탠리가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된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레이디 마거릿은 남편을 설득하는데 성공했었습니다만, 스탠리 경의 아들이 인질로 있었기에 대놓고 밝힐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이미 스탠리 가문 전체가 헨리 튜더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로 결심했었던듯합니다.

 

헨리 튜더가 잉글랜드에 상륙한뒤 리처드 3세는 귀족들을 소집하게 됩니다. 이때 토마스 스탠리도 있었지만 토마스 스탠리는 발한병Sweating sickness에 걸렸다는 이유로 가는 것을 미루게 되죠. 그리고 상황은 더 복잡해지는데 토마스 스탠리의 상속자인 조지 스탠리는 자신과 숙부가 헨리 튜더를 지지하기로 했다고 주장했었습니다만 아버지의 이름은 대지 않았죠. 이 상황에서 토마스 스탠리의 동생인 윌리엄 스탠리는 즉시 반역자로 선포되는데, 이때문에 윌리엄 스탠리는 바로 헨리 튜더 측에 합류할수 있었습니다. 반면 토마스 스탠리는 아들과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해야했었습니다. 어쩌면 이런 상황은 이전의 에드워드 4세 시절의 스탠리 가문의 행동과 비슷한 모양새였습니다. 토마스 스탠리는 미적대면서 헨리 6세 곁에 있었으며, 동생인 윌리엄 스탠리는 에드워드 4세 곁에서 적극적으로 군사적 행동을 했었고 이에 에드워드 4세가 권력을 잡은후 토마스 스탠리가 용서받았었죠.

 

윌리엄 스탠리, 토마스 스탠리의 동생, 그는 아들이 인질이 된 형과 달리 매우 적극적으로 헨리 튜더의 군대에서 활약했던 인물이라고 합니다.

 

헨리 튜더는 서서히 수도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고, 아마 그는 차츰 자신의 지지세력을 모으고 있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레이디 마거릿은 아들을 위해 군사자금들을 보내주었었죠. 헨리 튜더는 아마 스탠리 가문이 자신에게 합류하길 기다렸으며 먼저 윌리엄 스탠리가 헨리 튜더에게 오게 됩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군사적 행동을 했으며 헨리 튜더에게 충성스러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아마 8월 20일 경 토마스 스탠리가 헨리 튜더에게 오게 됩니다. 아마 그는 아들의 목숨이 위험에 처해있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만 아마 도박을 했었던듯합니다. 

 

그리고 8월 22일 보스워스 전투라고 불리는 전투가 시작됩니다. 리처드 3세와 헨리 튜더 사이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결국 헨리 튜더의 승리로 끝났으며, 리처드 3세는 이 전투에서 살해당하게 됩니다. 

 

보스워스 전투

 

헨리 튜더는 이제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었으며, 어머니에게 자신의 승리를 알리게 됩니다. 레이디 마거릿은 아들의 승리에 매우 기뻐하게 되죠. 소수의 병력으로 아들이 승리한것은 아마 신의 가호가 있었을 것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레이디 마거릿은  아들이 자신의 곁에 머물수 있으며, 이제 목숨에 대한 위협이 없이 잉글랜드에서 편안히 머물수 있다는 사실에 더욱더 기뻤을 것입니다.

 

이렇게 레이디 마거릿은 이제 the king's mother이 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