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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특집] 원대한 꿈을 위한 여정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14) 정치적 상황의 돌변 : 아들에 대한 걱정

엘아라 2021. 1. 21.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새해특집] 원대한 꿈을 위한 여정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14) 정치적 상황의 돌변 : 아들에 대한 걱정

 

레이디 마거릿의 아들인 헨리 튜더가 태어난 직후 국왕 헨리 6세는 헨리 튜더의 후견인으로 이복동생인 재스퍼 튜더와 다른 귀족 한명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헨리 튜더는 자신이 태어난 펌브로크성에서 자라게 됩니다. 레이디 마거릿은 결혼하기전 아들과 함께 지냈으며 아마 이때 아들과의 다정한 감정을 쌓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들을 자신이 키울수는 없었죠. 하지만 중세 많은 여성들이 레이디 마거릿 같은 처지에 있었으며 아마 레이디 마거릿도 이를 받아들여야했을 것입니다. 다행히 조카를 너무 사랑하는 재스퍼 튜더가 헨리를 양육한다는데 위안을 삼았을 것입니다.

 

1458년 1월 만 15살이 채 되지 않은 레이디 마거릿은 자신의 나이 두배이상인 남자인 헨리 스태퍼드와 세번째 결혼을 합니다.  헨리 스태퍼드는 아버지가 버킹엄 공작이었지만 그의 지위를 이어받을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조카가 아버지의 지위를 이어받을 것이었죠. 이것은 헨리 스태퍼드가 경제적으로 큰 수입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또 그는 매우 온화한 사람이었으며 질병에 시달렸다고도 알려져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그가 정치적으로든 군사적으로든 크게 두드러진 행동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부부는 레이디 마거릿의 영지에서 주로 지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부부는 결혼생활동안 행복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부부는 레이디 마거릿의 아들인 헨리 튜더의 삶에 둘다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어린 아이를 떼어놓고 결혼해야했던 레이디 마거릿은 당연히 아들이 걱정되었으며 늘 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고 만나기도 했었죠. 그리고 아들이 필요한 것이 없나를 확인했었죠. 헨리 스태퍼드 역시 의붓아들인 헨리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으며 그에 대해서 잘 대해주려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헨리 스태퍼드와 레이디 마거릿 사이에서는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기에 아마도 헨리 스태퍼드는 의붓아들에게 더 많은 열정을 쏟았을 것입니다.

 

레이디 마거릿이 헨리 스태퍼드와 결혼생활을 하는동안 정치적 상황은 점차 더 혼란스러워지게 됩니다. 요크 가문측 사람들과 앙주의 마거릿을 중심으로하는 랭카스터 가문 사람들이 지속해서 계속 전투를 했었죠. 하지만 요크 공작의 세력은 컸는데, 요크 공작의 아들인 에드워드, 요크 공작의 처남이었던 샐리스버리 백작과 샐리스버리 백작의 아들인 워릭 백작은 모두 강력한 인물들이었으며 이들의 군대는 무시할수 없었습니다. 요크 공작은 이제 자신의 계승권리를 완전히 주장하게 되죠. 헨리 6세보다 자신이 계승권리가 우위에 있다고 주장했고 요크 공작의 세력이 컸었기에 결국 중재안이 진행됩니다. 헨리 6세는 살아있는 동안 왕위에 있으며 그의 후계자로 요크 공작과 그 후손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앙주의 마거릿은 스코틀랜드의 지원을 얻게 됩니다. 결국 전투를 통해서 요크 공작을 처형하게 되죠. 요크 공작의 죽었지만 요크 가문이 약해진것은 아니었습니다. 요크 공작의 상속자였던 마치 백작 에드워드가 이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계승권리를 주장하고 그의 사촌이자 강력한 동맹이었던 워릭백작도 여전히 남아있었죠.

 

1461년전까지 비록 불안정한 상황이었지만 레이디 마거릿과 그녀의 남편인 헨리 스패퍼드는 안정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아들인 헨리 역시 숙부인 재스퍼 튜더의 보호를 받고 있었으며 아마 할아버지인 오웬 튜더도 재스퍼와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461년 마치 백작과의 전투에서 재스퍼의 군대가 패배하게 됩니다. 오웬 튜더는 사로잡혀서 처형당했으며 재스퍼 튜더는 간신히 도망쳐야했습니다. 이것은 레이디 마거릿에게 큰 충격이었는데 아들인 헨리 튜더는 여전히 펌브로크 성에 있었으며 숙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었죠. 이것은 레이디 마거릿에게 엄청난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녀의 처지 또한 복잡하게 됩니다. 왜냐면 1461년 요크 가문은 완전한 승리를 얻게 되었으며 에드워드는 헨리 6세를 폐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레이디 마거릿과 그녀의 남편인 헨리 스태퍼드는 당연히 헨리 6세에게 충성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크 가문과 전투에서 랭카스터측에 참여하고 있었죠. 이것은 에드워드 4세가 즉위하면서 이들의 모든 것이 위태로울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레이디 마거릿의 친척들 모두가 랭카스터 측 사람이었으며 이들은 전투에서 패배해서 살해당했거나 아니면 도망쳐야했었습니다. 

 

다행히 헨리 스태퍼드는 에드워드 4세의 사촌이었으며 이것은 그가 사촌에게 금방 용서받을수 있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남편이 용서받았기에 당연히 레이디 마거릿 역시 용서 받았으며 그녀의 거대한 영지를 지킬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들에 대한 처분은 매우 걱정스러웠죠. 에드워드 4세는 재스퍼 튜더의 모든 영지를 에드먼드 튜더를 사로잡았고 죽게 만든 원인을 만들었던 윌리엄 허버트에게 줍니다. 그리고 헨리 튜더의 양육권 역시 그에게 줍니다.

 

헨리 튜더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헨리의 어머니인 레이디 마거릿은 거대한 영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는 레이디 마거릿의 첫째아들로 이 영지의 상속인이었습니다. 게다가 펌브로크 지역의 사람들 상당수가 헨리의 숙부였던 재스퍼에게 충성을 맹세했었기에 아마도 펌브로크를 통치하게된 윌리엄 허버트는 헨리 튜더가 자신의 손안에 있는 것이 유리한점이 있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듯합니다. 윌리엄 허버트와 그의 아내인 앤 데브뢰는 헨리 튜더를 매우 잘 대해줬다고 합니다. 특히 앤 데브뢰는 헨리를 너무나 아꼈고 이때문에 훗날 헨리가 국왕이 된후 앤 데브뢰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으로 대해줄 정도였었습니다. 헨리는 윌리엄 허버트의 자녀들과 함께 성장했고 이것은 아마 그의 어린시절에 또래 친구들과 함께 할수 있는 좋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허버트 부부는 헨리가 자신들의 딸과 결혼하기 바랬기에 아마 더 호의적으로 대해줬을 것입니다.

레이디 마거릿은 요크 지지자 손에 넘어간 아들의 처지에 대해서 매우 걱정했었지만 아들이 잘 지내는 것을 확인하고 그나마 안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이 혹시 부족한 것이 없는지 늘 관심을 가졌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치적 상황은 헨리 튜더의 지위를 지켜주지는 못했습니다. 헨리 튜더는 리치몬드 백작의 아들로 그의 영지를 상속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숙부인 재스퍼 튜더나 할아버지인 오웬 튜더가 반역자로 규정되었기에 그 역시 영지와 지위를 뺏기게 됩니다. 에드워드 4세는 그의 지위와 영지를 뺏아서 동생인 조지에게 주게 되죠. 물론 레이디 마거릿은 이에 대해서 당연히 분개합니다만 어쩔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들 뿐만 아니라 많은 랭카스터 쪽 사람들이 영지와 작위를 뺏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레이디 마거릿은 요크 가문 국왕의 첫번째 치세를 보내야했었습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