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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통치 가문들...(39) 벨프 가문 : 뤼네부르크 계승전쟁

엘아라 2020. 12. 25.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아 진짜 넘버링이 엄청 골치아프네요 --;;;;

앞의 분가들을 먼저할까 하다가 뤼네부르크 계승전쟁을 하고 난뒤에 다시 분가들에 대해서 정리해볼까합니다.

 

진짜 이거 내용이 너무 많아요 엉엉엉..ㅠ.ㅠ

 

유럽의 통치 가문들...(39) 벨프 가문 : 뤼네부르크 계승전쟁

 

뤼네부르크 계승전쟁은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가문의 분가중 하나였던 뤼네부르크 계열의 가문의 상속문제로 시작된 전쟁이었습니다. 첫번째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오토 1세는 두 아들에게 영지를 물려주었고 오토 1세의 아들 중 요한은 뤼네부르크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을 분할받았으며 이 지역은 뤼네부르크 공령이 됩니다. 그리고 요한의 후손들이 이 지역을 통치하죠.

 

요한의 손자였던 오토3세와 빌헬름2세는 아버지로부터 뤼네부르크를 공동으로 상속받았었는데, 오토3세가 먼저 죽고 빌헬름2세에게도 아들이 없으면서 계승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뤼네부르크 공이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이었던  빌헬름2세는 뤼네부르크 상속인으로 지명할수 있는 사람이 몇명이 있었습니다. 혈연적으로는 바로 자신의 외손자인 작센-비텐베르크의 알브레히트를 후계자로 내세울수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같은 가문인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가문의 분가중 하나였던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가문의 사람을 후계자로 내세울수 있었죠. 중요한 사실은 이전에 이미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쪽과 협의를 해서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의 아들과 자신의 또다른 딸을 결혼시키면서 사위를 후계자로 내세우기로 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과 결혼관계를 통해서 상속을 하는 편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위는 1367년 빌헬름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이에 빌헬름은 고민을 하게 되었죠.

 

뤼네부르크 공 빌헬름 2세

 

사실 빌헬름이 외손자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빌헬름과 황제 카를 6세간의 의견차가 있게 됩니다. 빌헬름은 외손자에게 자신의 영지와 지위를 물려주고 싶어했지만, 황제는 여성 계승에 반대해서 빌헬름의 외손자가 아니라 빌헬름의 외손자의 백부와 숙부에게도 권리를 부여하려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빌헬름과 황제는 의견조율에 실패했었으며 결국 빌헬름은 자신의 외손자가 아니라 같은 가문이자 딸의 시아주버니였던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마그누스 2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하게 됩니다.

 

1369년 뤼네부르크 공인 빌헬름 2세가 사망하면서 뤼네부르크 계승문제가 시작되게 됩니다. 빌헬름 2세가 지목한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마그누스 2세는 자연히 자신이 뤼네부르크를 상속받아야한다고 주장하게 되죠. 그러나 이때 마그누스 2세는 전쟁중에 있었으며 새롭게 상속받은 뤼네부르크 지역전체에 대해서 과중한 세금등을 징수하고 특권도 뺏게 되죠. 이것은 뤼네부르크 뿐만 아니라 하노버나 다른 대도시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행동했었습니다. 이 도시들은 한자 동맹에 중요한 영향을 받던 도시들이었으며 이런 특권을 뺏기는 것에 불만을 품게 됩니다. 

 

여기에 황제 카를 4세가 등장합니다. 황제는 뤼네베르크와 다른 도시들에 작센-비텐베르크 공작들을 통치자로 임명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들 도시들은 마그누스에 대한 불만으로 이를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결국 마그누스 2세의 군대를 몰아내고 작센-비텐베르크 공작들을 통치자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런데 뤼네부르크의 모든 지역에서 작센-비텐베르크 공작을 통치자로 인정한것은 아니었습니다. 상당수의 귀족들과 지역들은 마그누스 2세가 정당한 상속자로 여겼으며 그를 지지했었죠.

 

황제 카를 6세에게서 뤼네부르크 공령을 하사받는 작센-비텐베르크의 알브레히트

 

결국 이런 상태는 뤼네부르크 공령 전체에서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과 작센-비텐베르크 공작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어서 전투를 하게 되는 양상이 됩니다. 게다가 작센-비텐베르크 공작들과 마그누스 2세는 각자 외국 동맹세력까지 끌어들이면서 전투는 더욱더 치열하게 변하게 되죠. 1373년 중재를 위한 협상이 진행되지만 마그누스 2세는 이를 거부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1373년 7월 마그누스 2세는 전사했으며 이에 뤼네부르크를 두고 다툼을 벌이던 두 가문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가문(벨프 가문)과 작센 가문(아스카니아 가문)이 협정을 체결합니다. 뤼네부르크 지역은 두 가문 모두에게 봉신으로 맹세를 하고 두 가문은 협력해서 뤼네부르크를 통치한다는 것이었죠.이렇게 일단 계승전쟁을 봉합되었으며 두 가문은 동맹을 확인하기 위해 여러번 혼인관계를 맺게 됩니다.

 

작센-비르텐베르크의 벤츨슬라우

 

이후 다시 아스카니아 가문 출신으로 뤼네부르크를 장악하고 있었던 벤츨슬라우와 벨프 가문의 출신으로 마그누스 2세의 아들이었던 하인리히가 다시 갈등을 빚게 되었으며 결국 벤츨슬라우가 사망한뒤 뤼네부르크는 벨프 가문으로 돌아오게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벨프 가문은 뤼네부르크를 손에 넣을수는 있었지만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며, 뤼네부르크 지역은 벨프 가문의 법률이 아니라 제국의 법률을 직접 받는 독립적 지역으로 발전했었습니다.

 

 

벨프가문 가계도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