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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왕비들...(56) 작센의 게르베르가 : 루이 4세의 왕비(두번째)

엘아라 2020. 12. 31.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읽을것이 많네요 ㅠ.ㅠ

 

프랑스의 왕비들...(56) 작센의 게르베르가 : 루이 4세의 왕비(두번째)

 

작센의 게르베르가

로렌의 공작부인

서프랑크의 왕비

Gerberga of Saxony 

(c. 913 – 5 May 968/9 or 984?) 

 

 

남편이 죽고 집으로 돌아온 게르베르가는 오빠인 오토 1세의 정략 결혼 정책에 따라 다른 혼담이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게르베르가는 이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게르베르가는 곧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됩니다. 바로 서프랑크의 국왕이었던 루이 4세였죠. 연대기 저자에 따르면 루이 4세는 아름답지만 과부가 된 불우한 처지의 게르베르가를 보고 반했으며 그녀와 결혼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결혼은 매우 정치적인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게르베르가의 첫번째 남편이 로타링기아의 통치자였었기에 로타링기아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던 루이 4세의 목적에 부합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이유는 게르베르가의 언니인 작센의 헤드비히가 루이 르 그랑과 결혼했었고 이때문에 루이 4세 역시 동프랑크의 공주와 결혼해야만이 루이 르 그랑과 그의후손들과 경쟁할수 있다고 여겼다고 합니다.

 

서프랑크의 루이 4세

 

게르베르가는 곧 남편인 루이 4세에게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게 됩니다. 그녀는 루이 4세에게 일곱명의 자녀를 낳아주었을뿐만 아니라 남편과 동프랑크 왕국과의 갈등을 중재하기도 했었습니다. 아마 이것은 오토1세가 루이 4세와 좀더 사이가 좋아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며 후에 루이 4세가 바이킹에 붙잡히고 후에 위그 르 그랑의 손에 들어갔을때 오토 1세가 그를 풀어주라고 압력을 넣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 게르베르가는 정치적으로 결단력도 강했는데 이를테면 바이킹이 루이 4세를 포로로 잡고 두 아들들을 인질로 보내라고 했을때 후계자가 될 장남 로타르는 놔두고 다른 아들인 샤를만 보냈고 대신 아들의 후계자 지위를 확정하기도 했었습니다.

 

954년 루이 4세가 사망했을때 그의 후계자인 로타르는 13살이었으며 이때문에 게르베르가는 섭정이됩니다. 그녀는 자신이나 어린 아들이 나라를 완전히 장악할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남편의 숙적이자 형부였던 위그 르 그랑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오빠인 오토 1세는 너무나 위협적이었기에 차라리 형부를 선택한것이라고 합니다. 게르베르가는 언니인 헤드비히와 잘 지냈으며 특히 956년 위그 르 그랑이 죽은후 게르베르가는 아들이 성인이 될때까지 언니 헤드비히와 남자형제인 브루노와 함께 나라를 섭정으로 통치했었다고 합니다.

 

로타르의 대관식

 

959년 아들인 로타르가 성인이 되자 게르베르가는 수도원으로 은퇴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정치에서 손을 뗀것은 아니었는데 여러가지 행사나 정치적인 사건에 게르베르가가 여전히 개입했었다고 합니다.

 

게르베르가가 언제 죽었는지 정확히 알려져있지 않는데, 968년 이후 969년 정도에 사망했다고 여겨진다고 합니다만 984년경에는 그녀가 확실히 죽었다는 기록이 나오다고 합니다.

 

게르베르가의 아들중 장남인 로타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되었으며 샤를은 하로렌의 공작이 되었습니다. 딸인 마틸다는 부르고뉴 왕국의 왕비가 되었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