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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왕비들...(58) 이탈리아의 엠마 : 로타르의 왕비(두번째)

엘아라 2021. 3. 4.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이탈리아는 카롤링거 왕가에서 멈췄더니 정치 상황 이해하는데 머리 깨질것같습니다.ㅠ.ㅠ

 

프랑스의 왕비들...(58) 이탈리아의 엠마 : 로타르의 왕비(두번째)

 

이탈리아의 엠마

서프랑크의 왕비

Emma of Italy 

(Emma d'Italie; c. 948 – after 987) 

 

결혼후 서프랑크 왕비가 된 엠마는 결혼 다음해에 아들인 루이를 낳습니다. 후계자를 낳은 엠마 왕비의 지위는 아마도 어느정도 더 높아졌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엠마는 왕비로 대관했으며 정치적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치적 상황은 복잡해지고 이것은 엠마에게도 영향을 주게 됩니다.

 

로타르

 

973년 엠마의 의붓아버지였던 오토1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이자 엠마의 이부동생인 오토 2세가 즉위한뒤 서프랑크왕국와 신성로마제국간의 갈등이 심해집니다. 당연히 이웃한 두 나라였기에 갈등을 빚게 됩니다. 자주 영토분쟁이 일어나게 되죠. 이것은 서프랑크 궁정에서 엠마에 대한 반발을 일으키게 만드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엠마에 대한 직접적 공격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오토 2세, 엠마의 이부동생

 

977년 엠마의 시동생인 샤를이 엠마와 라온의 주교를 간통죄로 고소하게 됩니다. 여성에 대한 간통죄 고소는 특히 정치적 영향력이나 신분이 높은 여성인 경우 그녀의 지위를 끌어내리는데 더 큰 목적이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복잡한 정치적 문제 때문이었을 듯한데 동프랑크 왕국과 서프랑크 왕국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 된것일수도 있으며, 또 형에 비해서 늘 부당한 대우(샤를은 형대신에 바이킹에 인질로 보내졌었죠.)를 받았던 샤를의 분노때문일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간통죄에 대한 고소는 엠마 뿐만 아니라 엠마의 아들인 루이의 정통성에도 치명적일수 있었기에 당연히 엠마는 적극적으로 변호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랭스의 대주교의 적극적 개입으로 엠마는 무죄 선고를 받을수 있었으며, 샤를은 추방당하게 됩니다. 엠마는 아들의 지위를 보장받기 위해서 남편에게 아들을 공동국왕으로 즉위시키도록 요청했으며 로타르는 아들을 자신의 공동국왕으로 만들었지만 아들에게 실권을 부여한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엠마와 로타르의 관계는 외교적 문제때문에 사이가 벌어지기도 했었습니다만, 결국 오토 2세와 로타르가 평화관계를 유지하게 되면서 엠마와 로타르의 결혼생활 역시 평온하게 바뀌게 된다고 합니다.

 

986년 엠마의 남편인 로타르가 죽고 나서 엠마의 아들인 루이가 루이 5세로 즉위합니다. 엠마는 이때 올케로 조카 오토 3세의 섭정으로 활동하던 테오파뉴와 관계가 좋았기에 두 나라사이의 평화를 유지할수 있으리라 여깁니다. 하지만 엠마의 아들인 루이 5세는 어머니와 라온의 주교가 공모해서 아버지를 독살했다는 이유로 어머니를 궁정에서 추방해버립니다. 당시 서프랑크 왕국에는 두 세력이 존재했었습니다. 엠마와 랭스의 대주교를 중심으로 신성로마제국와 평화를 유지해야한다는 측과 엠마의 남편인 로타르처럼 신성로마제국을 공격해야한다는 측이었죠. 특히 오토 3세가 미성년이었기에 이런 상황을 이용해야한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루이 5세는 어머니측이 아니라 공격하자는 측을 지지하는 인물이었죠.

 

하지만 엠마의 아들인 루이 5세는 987년 낙마하면서 후손없이 사망합니다. 그리고 엠마의 시동생인 샤를 역시 위그 카페에게 붙잡히게 되죠. 이후 위그 카페가 서프랑크 국왕이 되면서 이후 그의 후손들이 서프랑크 왕국-후에 프랑스 왕국을 통치하게 됩니다.

 

루이 5세

 

엠마는 아들이 죽은뒤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려져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엠마가 남편과 아들이 죽고 나서 보헤미아의 공작 볼레슬라프 2세와 결혼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볼레슬라프 2세의 두번째 아내인 멜니크의 엠마가 사실 이 서프랑크의 왕비였던 이탈리아의 엠마라는 것이죠. 보헤미아의 볼레슬라프 2세와 재혼한뒤 엠마는 볼레슬라프의 두 아들들인 올드르지흐와 야로미르를 낳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볼레슬라프 2세의 장남인 볼레슬라프는 볼레슬라프 2세의 첫번째 아내인 아비다(잉글랜드의 앨푸지푸)의 아들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볼레슬라프 2세가 죽고 그의 장남인 볼레슬라프 3세가 즉위한뒤, 엠마와 그녀의 두 아들들은 볼레슬파프 3세를 피해서 바이에른궁정으로 피신했었으며, 후에 아들인 야로미로가 프라하를 점령해서 다시 공작 지위를 되찾은후 엠마는 보헤미아로 돌아갔으며 멜니크에서 남은 생을 보냈다는 것이죠. 물론 이 이야기는 가설이며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