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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프랑크 왕국의 왕비들...(6) 링겔하임의 마틸다 :하인리히 1세의 왕비

엘아라 2020. 9. 24.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마틸다까지만 하고 동프랑크 왕국 끝입니다. 오토부터는 신성로마제국이라서 사실 앞에서 했었습니다.

(이때까지 아 프랑스 왕비들 끝나면 넘어가면 되겠네..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앞에서 했네요..왠지 이름이 익숙하더라니....)

 

하여튼 다음달부터는 이제 원래의 프랑스 왕비들로 갑니다. -0-;;;;

 

동프랑크 왕국의 왕비들...(6) 링겔하임의 마틸다 :하인리히 1세의 왕비

 

링겔하임의 마틸다

Matilda of Ringelheim

Saint Matilda,

 (c. 892 – 14 March 968),

 

마틸다는 작센의 그라프로 링겔하임의 디트리히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인 디트리히는 중세 초기 작센의 귀족 가문이었던 이메딩거immedinger가문 출신이라고 합니다. 마틸다의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할머니인 마틸다는 헤르포트 수녀원을 세웠으며 이곳의 수녀원장이 됩니다.  중세 초기 여성이 수녀원을 짓고 수녀원장이 되는 것은 강력한 귀족가문출신으로 재산이 많았다는 것을 추정할수있습니다.

마틸다에게는 세명의 자매와 한명의 남자형제가 있었는데 특히 자매였던 프레데루나는 서프랑크 왕국의 샤를 3세와 결혼했었다고 합니다. 마틸다는 자매들과 함께 할머니인 마틸다의 수녀원에서 교육받았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당대 수녀원은 상급 교육기관이기도 했었습니다.

 

헤르포트 수도원의 문장

 

마틸다는작센의 강력한 집안출신이었고 이것은 그녀의 자매들이 정치적으로 연결되는 계기가 됩니다. 마틸다의자매중 한명이었던 비아Bia는(프레데루나라는 이야기도있지만, 프레데루나는 샤를 3세와 결혼했기에 아마도 비아로 추정하는듯합니다. 물론 샤를 3세와 결혼한 프레데루나에 대해서 마틸다의 조카라는 의견도 있는 듯합니다) 작센의 강력한 인물이었던 빌룽 가문 출신인 작센의 비그만 빌룽과결혼합니다. 이것은 마틸다의 존재를 더 중요하게 만들었는데 비그만은 작센에서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인 헤르만 빌룽의 형제였었습니다. 헤르만 빌룽은 작센의 공작이었던 하인리히의 조력자중 한명이었고 아마도 이런 정치적 관계는 마틸다가 하인리히 1세와 결혼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909년 마틸다는 작센 공작의 아들이었던 하인리히와 결혼합니다. 하인리히는 이전에 결혼을 했지만 마틸다와 결혼하기 위해서 그 결혼을 무효로돌렸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전처였던 메르세부르크의 하테부르크보다 마틸다가 더 정치적으로 중요한 여성이라는 의미였을 듯합니다. 

 

마틸다와 하인리히의 만남

 

마틸다는 어려서 수녀원에서 성장했기에 매우 신앙심이 깊었고, 이때문에 왕비였을때 퀘들린부르크 수도원을 세웠었습니다. 그리고 마틸다는 남편인 하인리히에게 영향력이 컸는데, 하인리히는 아내인 마틸다의 판단력을 매우 신뢰했었다고 합니다.

 

마틸다가 세운 퀘들린부르크 수도원은 후에 왕족 여성들이 주로 수녀가 되는 유명한 수도원이 되었으며 수도원의 영지를 독립적으로 보호받았으며 이때문에 주로 수녀원장은 왕족들이 되었습니다. 마틸다는 남편이 죽은뒤 수도원에서 지내면서 가족들과도 계속 교류를 했었습니다. 이때문에 퀘들린부르크 수도원이 더 중요히지기도 했었습니다.

마틸다는 나이가 들면서 아들인 오토와 갈등을 빚기도 합니다. 오토는 어머니의 재산을 자신이 관리해야한다고 주장했었는데, 마틸다는 아직 죽지 않았었기에 아들에게 섭섭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후에 며느리의 노력으로 아들과 화해했다고 합니다.

 

마틸다는 968년 병을 오래 앓다가 퀘들린부르크 수도원에서 사망했으며, 수도원에 묻힌 남편 곁에 묻혔습니다. 후에 마틸다는 시성되었습니다. 

 

성 마틸다의 조각상

 

마틸다는 하인리히 1세와의 사이에서 적어도 다섯아이를 낳았습니다. 그중 장남은 오토로 바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오토 1세가 되는 인물입니다. 다른 아들인 하인리히는 아버지에 의해서 바이에른 공작이 되었으며, 후손중 한명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기도합니다. 또 다른 아들인 부르노는 쾰른의 대주교가 되었습니다.

딸인 헤드비히는 서프랑크 왕국으로 시집갔으며, 위그 카페의 어머니가 됩니다. 또 다른 딸인 게르베르가는 처음에는 로렌의공작과 결혼했었으며,남편이 죽은뒤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이었던 샤를 4세와 결혼했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피디어

그림출처

위키미디어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