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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프랑크 왕국의 왕비들...(2)엥겔베르가 : 루도비쿠스 2세의 왕비

엘아라 2020. 7. 9.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이게 프랑크 왕국의 경우에는 이름 표기가 애매하거든요. 

아무래도 여러나라역사가 겹쳐있으니까 그렇긴한데 일단 우리나라 표기는 대체로 나라가 완전히 갈리기 전에는 라틴어식 표현을 쓴다고 알고 있습니다. (꼭 그래야한다는 것은 아니구요. 이를테면 샤를마뉴를 카롤루스 대제라고 쓰기도 하지만 그냥 샤를마뉴라고도 쓰니까요.)

 

그런데 제목이 프랑스의 왕비들이라서 일단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읽었거든요. 그런데 보니까 여긴 프랑스식으로 읽으면 안될것같아서 라틴어식 표기를 찾고 있는데 흑...좌절입니다. -0-;; (물론 읽는거는 라틴어식이 더 쉽긴합니다. 대신 길어서..-0-;;; 제가 로마에 약합니다.)

 

사실 지금부터는 중앙프랑크왕국 아닌데 그래도 묶어야해서 이렇게 씁니다. -0-;;;

 

중앙 프랑크 왕국의 왕비들...(2)엥겔베르가 : 루도비쿠스 2세의 왕비

 

엥겔베르가

Engelberga or Angilberga,

(died between 896 and 901) 

 

엥겔베르가는 로타리우스 1세의 아들이자 후에 그의 뒤를 이어서 황제가 되는 루도비쿠스 2세의 왕비였습니다. 그녀에 대해서는 많은 중세 여성들처럼 그다지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단지 후대의 사람들이 여러가지 추측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엥겔베르가는 아마도 주로 파르마의 아델기스의 딸로 추정합니다. 그는 이탈리아 왕국에서 매우 강력한 힘을 가졌던 스포니드스 가문 사람이었으며 이것은 엥겔베르가가 루도비쿠스 2세와 결혼한 것을 잘 설명할수 있습니다. 왜냐면 루도비쿠스 2세는 아버지로부터 이탈리아를 물려받았는데 그의 상속영지에 강력한 처가가 있었다면 그에게 힘이 되어줄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학자에 따라서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엥겔베르가가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이자 후에 황제가 되는 카롤루스 3세의 아내였던 리차르디스와 자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은 아마 엥겔베르가가 이탈리아 출신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녀가 어린시절 파비아의 수녀원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엥겔베르가는 851년 루도비쿠스와 결혼하죠. 엥겔베르가는 시아버지인 로타리우스가 죽기전까지 정치적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었다고 합니다. 

 

루도비쿠스 2세, 로마의 황제,엔겔베르가의 남편

 

855년 로타리우스 1세는 사망하면서 자신의 영지를 삼등분해서 아들들에게 물려줍니다. 엥겔베르가의 남편은인 루도비쿠스 2세는 이탈리아 왕국을 물려받았으며 이미 아버지 생전에 아버지와 함께 공동황제의 지위에 있었기에 아버지가 죽은뒤 황제 지위는 자연스럽게 루도비쿠스에게로 이어지게 됩니다.

 

남편이 이탈리아의 국왕이자 황제가 되자 엥겔베르가는 정치적인 영향력이 점차 커지게 됩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정치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었으며 특히 교황과 주교들사이의 분쟁에 관여하므로써 황제의 권위를 더 앞세우려는 정책을 폈었습니다. 특히 루도비쿠스 2세의 동생인 로타리우스 2세의 결혼문제에서 주교들과 교황이 대립하면서 주교들이 황제의 궁정으로 피신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에 황제는 교황에게 군사적 압박을 가하기도 했었죠.

 

궁정에서 엥겔베르가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자 당연히 그녀를 견제하려는 세력이 등장합니다. 특히 그녀가 황위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하자 그녀를 몰아내려는 시도가 일어나게 되죠. 이렇게 되자 엥겔베르가의 남편인 루도비쿠스 2세는 숙부였던 동프랑크의 국왕 루도비쿠스 게르마니쿠스와 후계자 문제를 협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귀족들은 엥겔베르가를 견제하기 위해서 루도비쿠스가 죽은뒤 그의 또다른 숙부였던 서프랑크의 국왕 샤를(카롤루스 2세)를 황제로 내세우죠.

 

황제 카롤루스 2세

 

남편이 죽은후 엥겔베르가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딸인 에르멩가르드와 함께 샤를의 총애받던 신하였던 프로방스의 보소에게 납치당하게 됩니다. 보소는 후에 876년 에르멩가르드와 결혼하죠. 보소는 아마도 에르멩가르드와 결혼하면서 야심을 가지게 된듯합니다. 이후 보소는 자신이 통치하고 있던 프로방스 지방의 국왕임을 선언하게 되죠. 그리고 엥겔베르가는 이를 지지했었구요.

 

당연히 황제였던 카롤루스 2세는 이에 대해서 격노하게 되었으며 아마도 엥겔베르가에 대해서 여러가지 제약을 가졌을 것입니다. 엥겔베르가는 카롤루스 3세(동프랑크의 국왕)가 황제가 되고 난뒤에 이탈리아로 돌아갈수 있었으며,896년 이탈리아에서 수녀원을 세우고 그곳의 수녀원장이 됩니다만 얼마뒤에 사망합니다.

 

엥겔베르가의 외손자인 루도비쿠스 3세는 후에 황제가 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