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러시아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166) 마리야 파블로브나 : 알렉산드르 2세의 손녀 (여섯번째)

엘아라 2020. 8. 5.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지금 경품 추첨 방송보면서 글을 쓰는데 두근두근해서 글이 잘 안써져요. ㅎㅎㅎ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166) 마리야 파블로브나 : 알렉산드르 2세의 손녀 (여섯번째)

 

러시아의 마리야 파블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Maria Pavlovna of Russia 

Maria Pavlovna the Younger, 

(Великая Княгиня Мария Павловна)

(18 April [O.S. 6 April] 1890 – 13 December 1958),

 

 

1차대전이 일어나면서 러시아 황실가족들은 모두 러시아로 돌아와서 전쟁에 참전하죠. 마리야의 아버지와 동생들 역시 돌아오게 됩니다. 마리야는 많은 왕족들처럼 간호사로 일을 하러 갑니다. 또 마리야는 러시아로 돌아온후 이제 수녀가 된 백모이자 양어머니였던 엘라 대공비를 자주 방문합니다. 아마도 마리야는 어려운 일을 많이 겪으면서 아마도 엘라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바꼈을수 있을듯합니다.

 

수녀 복장의 엘라 대공비

 

1916년 12월 라스푸틴이 암살당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마리야는 여기에 동생인 드미트리가 관여되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마리야는 동생과 늘 함께한다고 여겼었는데 이것은 순전히 드미트리가 스스로 결정한 일이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마리야는 동생인 드미트리를 추방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니콜라이 2세에게 탄원했었다고 합니다.

 

드미트리 대공

 

하지만 곧 2월 혁명이 일어나고 황제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게 됩니다. 이후 러시아 상황은 매우 혼란해졌으며 러시아 황실 가족들 역시 혼란한 상황을 맞게 됩니다. 마리야는 아버지와 함께 짜르코예 슬로에서 지내게 되죠. 이때쯤 마리야는 새로운 결혼 생활을 꿈꾸게 됩니다. 전쟁초기 마리야는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푸티야틴 공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둘은 어린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힘든 상황에서 둘은 서로에 대한 마음이 커졌을 것이며 마리야와 세르게이는 약혼을 했으며 9월에 그와 정식으로 결혼합니다. 마리야와 세르게이는 서로 사랑에 빠져서 결혼한 것이었으며 마리야에게는 좀더 행복감을 느꼈을 듯합니다. 물론 이 상황에서 사는 것이 힘들었는데 처음에 마리야는 남편과 함께 드미트리의 궁전에서 지냈으며 후에는 세르게이의부모와 함께 작은 집에서 살았었다고 합니다.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푸티야틴, 마리야의 두번째 남편

 

10월 혁명이후 황실 가족들의 안전과 재산권리에 위협을 받게됩니다. 마리야는 많은 황족들처럼 탈출하고 싶었지만 갈수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그녀는 임신을 했기 때문이었죠. 대신 마리야는 남편과 함께 은행에 맡겨놓은 보석들을 찾으러 갔었지만 가져올수 없었으며 나중에 겨우 몇가지를 회수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1918년 마리야 부부는 가택연금중인 마리야의 아버지 파벨 대공의 근처로 가서 살러 갑니다. 여기서 마리야는 정원에 채소와 염소를 키우는 등 어려운 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야는 1918년 7월 8일 아들인 로만을 낳았습니다. 로만은 1918년 7월 18일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두가 알지 못했었지만 이날 마리야의 백모였던 엘라와 이복 남동생인 블라디미르 팔레이가 볼셰비키에 의해서 살해된 날이기도 했었습니다.

 

블라디미르 파블로비치 팔레이, 마리야의 이복 남동생

 

마리야는 아이를 낳은뒤 남편과 시동생 그리고 러시아를 떠나기로 결정합니다. 아이는 시부모가 맡게 되죠. 아마 마리야의 아버지인 파벨 대공은 병을 앓았기에 떠날수가 없었던듯합니다. 마리야와 남편 시동생은 불안에 떨면서 겨우 도망칠수 있었지만 마리야의 아버지는 그렇지 못했고 볼셰비키에 의해서 체포됩니다. 

 

마리야는 많은 난민들처럼 우크라이나를 통해서 러시아로 가려합니다. 그리고 마리야는 자신이 스웨덴의 전 왕자비였다는 문서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 문서 덕분에 우크라이나를 통해서 키예프로 갈수 있었으며 이후 루마니아로 갈수 있었습니다. 루마니아의 왕비는 바로 마리야의 사촌이었던 에든버러의 마리였었기에 그녀의 도움을 받으려 했을것입니다. 

1919년 초 마리야는 남편과 함께 마리 왕비가 마련해준 거처에서 머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곧 러시아에서 비극적 소식이 연달아 들려옵니다. 먼저 아버지인 파벨 대공이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죠. 그리고 니콜라이 2세 가족의 처형소식은 물론, 마리야의 백모였던 엘라 대공비와 이복 남동생인 블라디미르 팔레이 공 역시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파벨 대공과 팔레이 공비 그리고 둘의 세 아이들

 

마리야의 시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부쿠레슈티로 왔었지만 마리야는 다시 남편과 함께 파리로 가서 살곳을 마련합니다. 이때 마리야는 많은 망명 왕족과 귀족들처럼 먹고 사는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마리야는 이전에 스웨덴으로 빼돌려놨던 보석들을 팔아서 생활해야했는데 이전에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 전혀 걱정이 없었던 마리야에게 이런 삶은 너무나 힘든 것이기도 했었죠. 게다가 마리야의 시부모는 편지를 보내서 마리야의 아들이 사망했다고 알리게 됩니다. 이것은 마리야에게 큰 충격이었으며 아이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아예 아이의 존재에 대해서 입밖에 내지 않으려했다고 합니다.

 

이후 마리야는 남동생인 드미트리와 런던에서 다시 만났었습니다. 마리야는 드미트리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지만 마리야의 남편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었습니다. 드미트리 역시 매형에 대해서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런던에서 마리야는 수편물등을 만들어서 팔았다고 합니다.

 

마리야는 이후 파리로 가게 됩니다. 파리에는 새어머니였던 올가 팔레이와 이복 여동생들이 있었고 마리야는 이들과 가깝게 지내고 싶어했죠. 이후 드미트리 역시 파리로 오게 되죠. 마리야는 이때 자신의 아들인 레나르트를 만나려했고 잠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가끔 아들과 만나게 되죠. 파리에서 마리야는 자수와 섬유가게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드미트리를 통해서 코코 샤넬을 만나게 되죠. 샤넬은 마리야의 가게를 자주 이용했고 마리야는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코코 샤넬과 드미트리 대공

 

마리야의 성공은 마리야와 남편과의 사이를 도리어 나쁘게 만듭니다. 마리야는 자신이 번돈과 보석을 판 돈으로 가족들을 부양했었으며 사업을 하는데 열정을 쏟아부었습니다.하지만 마리야의 남편인 세르게이는 아내를 돕기 보다는 그저 아내의 돈을 쓰고 사는 일을 했었습니다. 이때문에 마리야는 남편에게 환멸을 느꼈으며 결국 1923년 마리야는 남편과 이혼을 합니다. 물론 남편과 그가족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계속하기로 하고 말입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