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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들과 그 후손들...(272)머리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 : 제임스 5세의 아들(첫번째)

엘아라 2020. 5. 11.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음냐.....글쓰는데 정말 익숙하지 않네요. 브런치 쓰듯이 쓰면 되는것은 같은데 제가 브런치랑 블로그랑은 글쓰는 것이 좀 달라서 말입니다. 이거 좀 잘해봐야겠습니다. ㅠ.ㅠ

 

정부들과 그 후손들...(272)머리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 : 제임스 5세의 아들(첫번째)

 

제임스 스튜어트

1대 머리 백작

James Stewart, 1st Earl of Moray 

(c. 1531 – 23 January 1570)

 

후에 머리 백작이 되는 제임스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의 국왕 제임스 5세와 그의 정부였던 마거릿 얼스킨의 아들로 1531년 태어났습니다. 제임스 5세는 한때 정부였던 마거릿 얼스킨과 결혼하려고 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었는데 아마도 아들인 제임스 스튜어트 때문이었을듯합니다. 제임스 5세는 프랑스 공주와의 결혼협상이 거의 마무리 될 무렵인 1536년 제임스 스튜어트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했으며 그에게 여러 영지를 부여했습니다. 그리고 1538년에는 세인스 앤드류스의 프라이어(Prior of St. Andrews)지위를 부여하므로써 아들에게 안정적 수입을 주기도 했습니다.

 

제임스 5세와 그의 아내인 마리 드 기즈

 

아마 제임스 스튜어트는 국왕의 아들이자 안정된 지위를 부여받았었기에 평온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제임스 5세의 왕비였던 마리 드 기즈는 국왕의 사생아 아들들을 궁정에서 교육시켰으며 제임스 스튜어트 역시 궁정에서 마리 드 기즈등과 잘 알고 지냈을 것이며 이것은 마리 드 기즈가 그에게 호의적이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잉글랜드의 대사는 1553년 마리 드 기즈가 그를 섭정중 한명으로 내세우려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또 제임스는 1558년 이복여동생인 메리 스튜어트가 프랑스의 도팽 프랑수아(프랑수아 2세)와 결혼할때 결혼식에 참석하기도 했었습니다.

 

프랑수아 2세와 메리 스튜어트

 

제임스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 내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입장이 됩니다. 그는 스코틀랜드 칼뱅파의 핵심인물이 되었는데 잉글랜드의 설교가는 그를 매우 뛰어난 종교지도자로 묘사할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종교가 이복 여동생인 메리 여왕과의 사이를 소원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메리 여왕은 남편인 프랑수아 2세가 죽은뒤, 프랑스에서 스코틀랜드로 돌아오게 됩니다.  돌아온뒤 여왕은 이 이복오빠를 신임해서 그를 자신의 최고 조언자로 만들었습니다. 종교적 문제가 있긴 했지만 그 외의 정치적 문제는 아마도 여왕이 매우 신뢰했었기에 결국 1562년 제임스 스튜어트는 메리 여왕에 의해서 "머리 백작"이 됩니다.  제임스 스튜어트의 부상은 다른 귀족과 불화가 생기게 했는데 특히 스코틀랜드 북서쪽의 광대한 영역을 가진 귀족이었던 헌틀리 백작 조지 고든은 제임스 스튜어트에게 부여된 머리 백작 지위에 반발을 했으며 결국 반란을 일으켰었습니다. 하지만 머리 백작은 이를 진압했죠.

 

메리 스튜어트, 남편 프랑수아 2세가  죽은뒤 상복을 입은 모습

 

머리 백작 역시 여왕과의 마찰은 피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특히 여왕이 단리경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했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어느정도 종교개혁이 진행된 스코틀랜드에서 가톨릭교도인 단리경과 여왕이 결혼하므로써 가톨릭 세력이 강화되는 것을 두고 볼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국 여왕은 단리경과 결혼했으며 이 사건은 머리 백작에게는 위협으로 다가왔고 결국 1565년 종교를 이유로 반란을 일으킵니다만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잉글랜드로 망명해야했다고 합니다. 잉글랜드로 갔을때 처음에는 엘리자베스1세는 반란을 일으킨 이를 받아들일수 없다고 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머리 백작은 여왕 개인의 목숨을 노린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 때문이었다고 주장했었다고 합니다.

 

두번째 남편 단리경과 함께 있는 메리 여왕

 

그러나 머리 백작은 곧 다시 메리 여왕의 용서를 받게 됩니다. 바로 1566년 단리경과 그 친구들이 여왕의 개인비서인 데이비드 리치오를 살해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여왕은 단리경에 대한 불신이 가중되었기에 결국 단리경을 반대하던 머리 백작을 용서하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오도록 허락했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피디어

그림출처

위키미디어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