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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통치 가문들...(20) 스튜어트 가문 : 스코틀랜드 왕가 (첫번째)

엘아라 2020. 5. 22.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왕가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중간에 단리경의 가문을 어떻게 넣어할지 모르겠습니다.ㅠ.ㅠ

 

유럽의 통치 가문들...(20) 스튜어트 가문 : 스코틀랜드 왕가 (첫번째)

 

스튜어트 가문이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얻게 된것은 아버지인 월터 스튜어트가 로버트 더 부르스의 딸인 마조리가 결혼해서 마조리와의 사이에서 아들 로버트가 태어나면서였습니다. 마조리는 아들이 태어난 얼마뒤 사망했었기에 로버트 스튜어트는 로버트 더 부르스의 중요한 후손중 하나가 됩니다. 하지만 로버트 스튜어트는 어머니를 통해서 계승권리가 있었기에 부르스 가문의 남성 후계자보다는 후계권리가 밀리게 됩니다. 처음에 로버트 더 부르스는 외손자보다 동생인 에드워드 부르스를 왕위계승자로 승인합니다만 그가 곧 사망하게 되죠. 이때문에 다시 로버트 스튜어트의 지위가 올라가게 되지만 결국 로버트 더 부르스에게 아들 데이비드가 태어났고 결국 로버트 스튜어트는 왕위계승이랑 멀어진듯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로버트 더 부르스는 나이가 많았으며 데이비드 2세는 나이가 어렸기에 데이비드 2세에게 후손이 없을 경우를 대비해야했고 로버트 스튜어트는 데이비드 2세의 후손이 없을경우 로버트 스튜어트가 왕위계승자가 될수 있도록 권리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데이비드 2세가 후계자없이 죽고난뒤 로버트 스튜어트가 국왕 로버트2세로 즉위됩니다.

 

로버트 스튜어트 (로버트 2세)의 씰

 

로버트 스튜어트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첫번째 결혼으로 태어난 장남인 존 스튜어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국왕이 됩니다. 그는 국왕이 되면서 왕명을 로버트로 바꾸었기에 로버트 3세가 되죠. 하지만 사실 그는 통치를 거의 할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죽기전 잉글랜드와의 전투에서 가장 큰 지지세력을 잃었을뿐만 아니라 자신도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며 이때문에 그의 동생인 파이프 백작 로버트(후에 알바니 공작 로버트)가 대세로 뜨게 됩니다. 로버트 3세는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여전히 권력이 없었으며 권력은 동생인 알바니 공작이 장악하고 있었죠. 이후 로버트 3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로스시 공작 데이비드 스튜어트는 숙부였던 알바니 공작 로버트 스튜어트와 권력을 두고 다툼을 벌입니다. 하지만 결국 알바니 공작은 조카인 로스시 공작을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이것은 알바니 공작의 권한을 더 강화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로버트 3세의 하나밖에 남지 않은 제임스의 안전을 걱정하는 상황이 됩니다.

 

로버트 3세와 왕비인 아나벨라 드럼몬드

 

로버트 3세에게 마지막 남은 아들이 된 캐릭 백작 제임스는 안전에 위협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마도 로버트 3세와 그 측근들은 제임스의 안위를 위해서 일단 그를 프랑스로 보내려했습니다. 하지만 1406년 프랑스로 가던중 잉글랜드의 사략선에 잡히게 되었으며 결국 제임스는 잉글랜드의 포로가 됩니다. 그리고 아들이 포로가 된 직후 로버트 3세는 사망했기에 제임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스코틀랜드의 국왕이 됩니다만 그는 잉글랜드에 있었기에 스코틀랜드에서 대관식을 할수 없었으며 오래도록 잉글랜드 궁정에서 포로로 남아있게 됩니다. 10대 초반에 포로가 된 제임스1세는 잉글랜드 궁정에서 성장했으며 그는 잉글랜드 궁정이나 당시 잉글랜드 국왕인 헨리 5세을 존경하게 되죠. 그래서 심지어 그는 1420년-1421년 사이의 잉글랜드와 프랑스간 전투에 잉글랜드 측에 서서 참전했으며 헨리 5세가 사망한뒤 시신을 런던으로 옮겨올때 그의 운구에도 참가할정도였습니다. 

복잡한 스코틀랜드 상황과 헨리 5세의 이른 죽음은 제임스 1세가 스코틀랜드로 돌아갈 기회를 마련하게 됩니다. 스코틀랜드 측에서도 적극적으로 제임스 1세의 귀환을 추진했고, 잉글랜드에서도 그를 어서 스코틀랜드로 보내려했고 결국 제임스 1세는 돌아갈수 있었습니다.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 비해서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던 잉글랜드 궁정에서 자랐기에 아마도 스코틀랜드의 왕권을 잉글랜드처럼 강화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입니다. 게다가 스스로도 전쟁에 참전했던 기사이기도 했으며 잉글랜드 왕가의 방계 가문 출신으로 당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보퍼트 가문 출신의 조앤 보퍼트를 왕비로 맞았기에 잉글랜드와의 관계를 좀더 유연하게할수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제임스 1세는 당연히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이것은 이전에 국왕이 없을때 자신의 마음대로 할수 있었던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결국 제임스 1세는 결국 암살당하게 됩니다.

 

제임스 1세와 왕비인 조앤 보퍼트

 

제임스 1세가 암살당했을때 국왕과 같은 곳에 있던 왕비 조앤 보퍼트는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을 암살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애솔 백작 월터 스튜어트 ( 로버트 2세의 아들로 제임스 1세의 숙부)를 제거하는데 성공했으며 아들인 제임스 2세가 왕위에 오르는데 일조합니다. 하지만 제임스 2세는 미성년이었으며 이것은 그녀가 스코틀랜드의 섭정이 되어야한다는 의미엿으며 이것은 귀족들에게는 또다른 문제였습니다. 비록 왕비였다지만 그녀는 외국인 그것도 숙적인 잉글랜드 출신이었기에 견제세력들이 많았을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조앤 보퍼트가 미성년인 아들 제임스 2세의 섭정권한은 물론 양육권리마저 뺏기는 원인이 됩니다.

 

제임스 2세는 미성년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그의 섭정으로 이전 제임스 1세의 총신이었던 더글라스 백작이 힘을얻게 됩니다. 결국 더글러스 백작 가문과 제임스 2세는 마찰을 빚게 되었고 제임스 2세는 8대 더글라스 백작을 처형하므로써 왕권을 강화합니다. 아마 국내 왕권을 강화한 제임스 2세는 이제 잉글랜드와의 관계롤 눈을 돌리게 됩니다. 특히 이전에 잉글랜드에 뺏긴 성들을 되찾을궁리를 했었죠. 특히 그는 대포에 관심이 많았는데 처가인 플랑드르에서 대포를 수입했으며 이 대포들을 가지고 록스버러성을 공격합니다. 하지만 이 포위 공격중 제임스 2세 근처에 있던 대포가 폭발해서 사망했습니다.

 

제임스 2세와 아내인 괴데른의 마리

 

제임스 2세의 아들인 제임스 3세 역시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미성년으로 국왕이 됩니다.그리고 역시 섭정단들이 제임스 3세가 성인이 될때까지 국정을 이끌어갔습니다. 성인이 된 뒤 제임스 3세 역시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그의 최대 실책은 아마도 이전까지 숙적으로 여겼던 잉글랜드와의 평화조약을 맺었다가 다시 깨고 전쟁을 한 것일것입니다. 이것은 아마 친잉글랜드파나 반 잉글랜드파 모두에게 불만을 주는 것이기도 했을 듯합니다. 게다가 그는 동생들과의 권력싸움까지 이어졌었고 이것은 그가 권력을 뺏기고 감금당하거나 다시 권력을 되찾는등의 일을 했습니다. 게다가 제임스 3세는 다시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추진했기에 점점 더 인기가 떨어졌으며 아내와 장남과도 사이가 틀어졌고 대놓고 차남을 후계자로 밀기위한 행동까지 했습니다. 결국 귀족들과 의회가 국왕에 대항해서 전투를 했고 제임스 3세 역시 이를 진압하기위해 나섰습니다만 사망합니다.

 

제임스 3세와 왕비인 덴마크의 마르가레타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