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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라의 인판타들...(27) 나바라의 블란카 : 후아나 2세의 딸

엘아라 2020. 4. 21.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그림을 보고 어디서 많이 봤다 싶었더니 바이에른의 이자보할때 이자보가 한동안 같이 살았다던 프랑스 왕비가 바로 이 블랑쉬군요. 음냐 그런데 필리프 6세의 부인인것은 좀....-0-;;;

이참에 근친결혼은 합스부르크만하는거 아니야..에서 프랑스쪽도 좀 써야겠습니다. 여기도 보니까 족보가 엄청 꼬이네요 --;;;;


나바라의 인판타들...(27) 나바라의 블란카 : 후아나 2세의 딸



나바라의 블란카

프랑스의 왕비

Blanche of Navarre 

French: Blanche d'Évreux; 

(1330 – 5 October 1398)

딸인 잔와 함께 있는 블란카

저기 뒤의 사람이 남편인 필리프 6세인줄 알았는데 보니까 성 루이(루이9세)인듯해요.



프랑스 식으로 블랑쉬 데브뢰 정도로 불렸을 나바라의 블란카는 1330년 나바라의 여왕이었던 후아나 2세와 그녀의 남편인 펠리페 3세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가 태어났을때는 위로 두 언니들과 오빠가 있었으며 후에는 남동생들과 여동생들이 태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아마도 그녀가 나바라의 계승권리에서 한발자국 떨어져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언니들보다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계승자였을 것입니다.


블란카의 부모는 블란카의 언니인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동맹을 위해서 카스티야로 시집보내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알폰소 11세의 아들인 페드로와 블란카의 약혼을 추진했었지만 이 것은 성공하지 못했었고, 카스티야는 잉글랜드와 혼담을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페드로는 에드워드 3세의 딸인 조앤과 결혼하기로 결정됩니다. (하지만 조앤은 결혼하러 오다가 흑사병으로 사망했고, 가장 사랑하는 딸을 잃은 에드워드 3세는 상심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_)



카스티야의 페드로 1세

....마리야 데 파딜라와의 관계로 유명한걸 생각해보면...-0-;;;;



이후 블란카의 혼담은 복잡하게 진행됩니다. 1349년 수많은 사람들이 흑사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여기에는 블란카의 어머니인 후아나 2세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왕위계승자였던 장의 아내인 보헤미아의 본이나 프랑스의 왕비였던 부르고뉴의 잔도 포함되었습니다. 


아마 1349년 9월 장의 아내인 보헤미아의 본이 죽자 아마도 후아나 2세는 자신의 딸인 블란카를 장의 후처로 보내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후아나 2세는 10월에 사망합니다. 비록 후아나 2세는 사망했지만 아마 혼담은 계속 진행되었던것같은데 그해 12월에 프랑스의 왕비인 부르고뉴의 잔이 죽으면서 상황은 더 복잡해지게 됩니다.



필리프 6세와 첫번째 아내인 부르고뉴의 잔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 궁정에서 지냈을 블란카는 프랑스 궁정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있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당대 매우 아름다웠다고 알려져있었죠. 아마도 블란카가 나바라의 상속권리와 좀 떨어져있었어도 중요한 왕위계승자와 혼담이 오갔던 것은 이때문일듯합니다. 아마도 필리프 6세의 아들인 장 역시 이런 블란카에 대해서 알았을 것입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의 혼담 상대가 그녀 하나만이 아니었던것입니다. 오베르뉴와 볼로뉴의 여백작인 잔 역시 과부가 되었으며 그녀는 블란카보다 더 중요한 영지를 가진 상속녀였던 것입니다. 비록 그녀의 영지는 첫번째 남편의 아들이 물려받겠지만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 그녀의 영지는 그녀의 남편이 아내를 대신해서 통치할수 있는것입니다.



장2세와 그의 두번째 아내인 오베르뉴의 잔



아마도 이런 상황은 결국 12월에 아내를 잃은 필리프 6세가 블란카와 결혼하면서 정리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블란카는 1350년 1월 자신보다 거의 40살이나 많은 필리프 6세와 결혼했으며 프랑스의 왕비가 됩니다. 

하지만 블란카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하는데 필리프 6세가 1350년 8월에 사망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블란카는 임신중이었고 유복자인 딸 잔을 낳았습니다. 


남편이 죽은뒤 블란카는 노르망디로 가서 지내게 됩니다. 이때 이전의 그녀의 혼담 상대이자 카스티야의 국왕이 된 페드로는 이제 블란카를 아내로 맞길 원했다고 합니다만 블란카는 프랑스 왕비는 재혼하지 않는다면서 이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블란카는 아마 딸인 잔을 키우면서 조용히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잔은 아라곤의 페드로 4세(잔의 이모부)의 아들인 후안과 결혼하기로 결정이 되었고 1370년 약혼을 합니다. 그후 1371년 결혼하기위해서 아라곤으로 떠났지만 가던 도중에 사망하게 되죠. 



블란카와 딸 잔의 무덤 조상


딸마저 잃은 블란카는 더욱더 조용히 살았을 것입니다만 아마도 프랑스 왕가의 최고 어른으로 대접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녀는 후에 샤를 6세가 바이에른의 이자보와 결혼한뒤 한동안 이자보와 함께 지내기도 했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