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바라의 후아나
Joan (aft 1342–1403),
후아나는 후아나 2세의 막내딸로 오빠였던 카를로스 2세가 노르망디에 대한 정치적 목적으로 그녀의 혼담을 진행했었습니다.
후아나의 첫 혼담은 아마도 1364년 가스코뉴 출신의 영주였던 장3세 드 그라일리(존 드 그래일리)와의 혼담이었습니다. 장3세 드 그라일리는 가스코뉴 출신의 기사로 연대기 저자였던 장 푸르아사르가 "이상적인 기사"라고 묘사했던 인물이라고 합니다. 그는 100년 전쟁중 잉글랜드 측에 섰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프랑스 군에 사로잡히게 되었으며 아마 이때 혼담 역시 깨진걸로 추정됩니다.
두번째 혼담은 1371년 알랑송 백작 샤를의 아들이었던 로베르 드 알랑송과의 혼담입니다. 로베르 드 알랑송은 프랑스의국왕 필리프 6세의 조카였습니다. 또 로베르의 어머니였던 마리아 드 라 이 데 라라는 후아나의 백부였던 샤를 데브뢰의 아내였었는데 샤를 데브뢰가 죽은뒤 알랑송 백작 샤를과 재혼했던 것입니다. 이런 연결고리때문에 카를로스 2세는 다시 이 혼담을 추진했었으며 이것은 노르망디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당연히 프랑스쪽에서 좋아하지 않았으며 프랑스의 국왕 샤를 5세가 반대한다고 합니다.
후아나는 결국 1373년 브르타뉴 공작령 내의 중요한 영주였던 장1세 드 로한과 결혼하게 됩니다. 장 1세 드 로한은 두번째 결혼이었는데, 로한의 영주는 브르타뉴 공작령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영주로 브르타뉴 공작과 자주 적대적 관계를 유지했었습니다. 재미난 것은 장 1세 드 로한의 딸중 한명이 후아나의 전 약혼자였던 로베르 드 알랑송과 결혼한다는 것입니다.
후아나는 장 1세 드 로한과의 사이에서 아들 샤를을 낳았습니다. 장 1세 드 로한의 영지는 전처 자식에게 물려졌습니다. 대신 후아나는 남편과 함께 게므네-쉬르-스코프르 지방을 구입했었는데 1395년 남편이 사망한후 아들인 샤를과 함께 게므네 지방으로 옮겨갔었습니다. 그녀의 아들인 샤를은 이 게므네의 영주로 인정받았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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