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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라의 인판타들...(21)후아나 1세 : 엔리케 1세의 딸 (첫번째)

엘아라 2020. 3. 3.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아 프랑스 왕가로 시집가는 후아나군요 -0-;;

아 복잡하여라. -0-;;;;


나바라의 인판타들...(21)후아나 1세 : 엔리케 1세의 딸 (첫번째)




나바라의 후아나1세

프랑스의 왕비

Joan I 

(14 January 1273 – 31 March/2 April 1305)

후아나 1세의 씰



바스크어로 "호아나Joana"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는 후아나는 나바라의 국왕이자 상파뉴 백작이었던 엔리케 1세와 그의 아내인 아르투아의 블랑쉬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인 엔리케 1세는 테오발도 1세의 아들이었습니다. 형인 테오발도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그의 뒤를 이어서 나바라와 상파뉴를 물려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엔리케 1세 (상파뉴의 앙리 3세)의 씰


후아나의 어머니였던 블랑쉬는 아르투아 백작이었던 로베르 1세의 딸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베르 1세는 프랑스의 국왕 루이 8세의 아들이었으며, 블랑쉬는 프랑스 국왕의 손녀이기도 했었습니다. 결국 그녀가 엔리케와 결혼한 가장 큰 이유는 프랑스와 상파뉴-나바라 의 우호를 위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아르투아의 블랑쉬

프랑스의 루이 8세의 손녀

나바라의 왕비

후아나의 어머니



후아나는 부모의 외동딸이었는데 사실 엔리케 1세와 블랑쉬 사이에서는 아들인 테오발도가 태어났었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유모가 아이를 떨어뜨려서 사망했고 둘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후 딸인 후아나가 태어났었죠. 아이가 더 태어날수 없었던 것은 그녀의 아버지인 엔리케 1세가 후아나가 태어난 1년후인 1274년에 사망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죽고나자 왕가의 유일한 후손이 된 후아나는 나바라와 상파뉴의 상속녀가 되었으며, 나바라의 여왕, 상파뉴의 여백작 지위를 잇게 됩니다. 그리고 나라는 그녀의 어머니인 아르투아의 블랑쉬가 섭정으로 통치하게 되죠. 하지만 이것은 상속에 대한 복잡한 정치적 문제를 낳게 됩니다. 상파뉴에서는 첫 여성군주였으며, 나바라에서는 여왕의 남편이 되어서 나바라를 차지하기 위해서 주변 나라들의 경쟁이 치열하게 됩니다.




후아나 1세의 씰


어린 후아나는 상속녀가 되자마자 바로 주변 국가에서 신붓감으로 탐을 내게 됩니다. 아라곤이나 카스티야는 나바라의 영토를 원했으며 후아나와 결혼하는 가문이 나바라를 손에 넣게 되는 것이기에 당연히 눈독을 들이게 되죠. 뿐만 아니라 "연약한" 여성후계자와 여성 섭정이 통치하는 나바라와 상파뉴에 대해서 대놓고 무력으로 이들의 영지를 장악하려는 시도등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아마도 블랑쉬가 딸의 앞날을 위해서 또다른 선택을 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블랑쉬는 사촌인 프랑스의 국왕 필리프 3세에게 자신과 딸의 보호를 요청합니다. 사실 후아나는 상파뉴의 여백작으로 프랑스 국왕의 봉신신분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렇기에 필리프 3세가 개입하기도 적절했었죠. 물론 상파뉴는 물론 나바라까지 얻을수 있는 기회를 얻은 프랑스의 필리프 3세는 이 기회를 놓칠리가 없었습니다. 블랑쉬는 파리로 갔으며 1275년 딸인 후아나를 필리프의 아들중 한명과 결혼시키기는 조약을 맺게 됩니다. 이것은 후아나의 권리를 위해서 프랑스 왕가가 정식으로 개입할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었습니다. 




프랑스의 필리프 3세


이때쯤 후아나의 어머니인 블랑쉬는 재혼하게 됩니다. 그녀가 파리에 왔을때, 필리프 3세의 어머니인 프로방스의 마르거리트는 시조카가 되는 블랑쉬에게 자신의 친정조카인 랭카스터 백작 에드먼드를 소개시켜줍니다. 에드먼드는 잉글랜드의 헨리 3세와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의 아들이자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의 동생이기도 했었죠. 마르거리트는 조카가 부유한 여성과 결혼하길 원했기에 블랑쉬를 소개시켜줬으며 둘은 1276년 결혼합니다. 그리고 상파뉴로 가서 살았는데 아마도 블랑쉬의 섭정일에 랭카스터 백작이 관여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중세시대 여성의 행동이 제약되었던것과 연결될것입니다. 블랑쉬는 여성이었지만 이제 새 남편으로 역시나 뛰어난 기사로 알려져있었던 랭카스터 백작이 그녀 곁에 있었기에 봉신들이 그녀와 딸인 후아나에게 반발하는 것을 어느정도 억제할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조지와 함께 있는 기사 (아마 랭카스터 백작 에드먼드로 추정)

랭카스터 백작 에드먼드와 후아나의 어머니 블랑쉬의 손자가 바로 첫번째 랭카스터 공작이 되는 그로스몬트의 헨리로, 헨리의딸(블랑쉬의 증손녀)인 블랜치는 상속녀로 에드워드 3세의 아들로 랭카스터 공작이 되는 곤트의 존과 결혼했고 둘의 아들이 잉글랜드의 헨리 5세가 됩니다.




필리프 3세는 후아나와 아들을 결혼시키기로 합의한 뒤 나바라로 자신의 신하들을 파견했으며 어린 여왕을 프랑스 궁정으로 데려왔다고 합니다. 아마도 후아나는 어린시절 약혼한 많은 여성들처럼 시집이 될 프랑스 궁정으로 가서 자라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녀의 특수한 상황 -아버지는 죽었고, 어머니는 재혼했으며 다른 가까운 친척은 프랑스 국왕이었던 상황-은 아마도 그녀가 프랑스 궁정에서 자라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