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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라의 인판타들...(22)후아나 1세 : 엔리케 1세의 딸 (두번째)

엘아라 2020. 3. 10.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나바라의 인판타들...(22)후아나 1세 : 엔리케 1세의 딸 (두번째)




나바라의 후아나1세

프랑스의 왕비

Joan I 

(14 January 1273 – 31 March/2 April 1305)



후아나는 11살이었던 1284년 프랑스의 왕위계승자였던 필리프와 결혼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혼 1년후인 1285년 시아버지였던 필리프 3세가 사망하고 그녀의 남편인 필리프 4세가 즉위하면서 그녀 역시 나바라의 여왕이자 상파뉴의 여백작인 동시에 프랑스의 왕비가 됩니다.


후아나는 평범한 외모에 펑퍼짐한 모습이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조각상같은 미남이었다던 남편 필리프 4세와 대조적인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후아나는 대담하고 용기있으며 적극적인 성격의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마 그녀가 나바라의 여왕이자 상파뉴의 여백작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이런 높은 신분에서 나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듯합니다. 후아나의 고명딸로 매우 아름다웠다고 알려진 이자벨은 외모는 아버지 필리프 4세를 닮았던 것이 분명합니다만 훗날 잉글랜드에서 내전을 해서 남편인 에드워드 2세를 사로잡았고 아들인 에드워드 3세를 즉위시켜서 권력을 장악했던 이자벨은 아마도 어머니에게도 영향을 받은것 역시 분명할듯합니다.




생 드니에 있는 필리프 4세의 무덤 조상



잔이라는 이름으로 프랑스에서 알려졌을 후아나는 매우 성공적인 왕비였습니다. 그녀는 프랑스 왕비의 가장 중요한 의무인 후계자를 낳는 일에 매우 성공적이었죠. 그녀는 필리프 4세에게 세명의 아들을 낳아줬으며 막내로 딸인 이자벨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궁정에서 제일 높은 지위의 여성으로 궁정을 장악했었습니다. 비록 그녀의 시어머니였던 브라반트의 마리가 살아있긴 했지만 그녀는 국왕 필리프 4세의 친어머니가 아니었기에 궁정에서 필리프 4세에게 그다지 영향력을 행사할수 없었을 것이며 이것은 이전에 국왕의 모후가 궁정에서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것과는 달라진 원인일것입니다. (이를테면 루이 9세의 어머니인 카스티야의 블란카는 아들의 섭정으로 일했으며 며느리인 프로방스의 마리가 시집온 뒤에도 궁정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었습니다. )

게다가 필리프 4세는 아내인 후아나에 대해서 매우 감정이 깊었습니다. 필리프 4세는 아내인 후아나를 깊이 사랑했는데 아마도 후아나의 당당한 모습과 적극적인 모습이 필리프 4세가 후아나를 점점더 사랑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남편의 애정은 후아나가 궁정에서 힘을 얻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필리프 4세와 가족들



후아나는 그녀가 결혼하던 1284년 성인으로 선포되었으며 시아버지였던 필리프 3세에게 상위군주에게하는 충성맹세를 하면서 자신의 상파뉴 여백작 지위를 인정받게 됩니다. 그리고 상파뉴 여백작으로 그녀는 자신의 권리를 충실히 행사합니다. 비록 그녀의 남편인 필리프 4세는 행정관을 파견했지만 후아나는 스스로 상파뉴를 정기적으로 방문했으며 상파뉴 내의 문제를 자신의 뜻대로 처리했었다고 합니다.


후아나는 나바라의 여왕이긴 했지만 그녀가 나바라를 떠나온 이후 나바라를 한번도 방문한적이 없었으며 프랑스에서 파견된 총독이 나바라를 통치했었습니다. 이것은 나바라에서 프랑스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만든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재미난 것은 나바라에서 후아나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프랑스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려서부터 프랑스에서 성장한 후아나는 아마 자신을 나바라인이라기 보다는 프랑스인이라고 여겼을 가능성이 더 크지만 말입니다.



후아나


후아나는 1305년 사망했는데 그녀가 죽은 3년뒤 트루아의 주교가 그녀의 그림에 핀을 찔러서 저주해서 죽였다는 이유로 체포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후아나는 필리프 4세와의 사이에서 일곱 아이를 낳았으며 그중 세명의 아들과 한명의 딸이 성인으로 성장합니다. 이 세아들인 루이,필리프,샤를은 각각 차례로 프랑스의 국왕인 루이 10세, 필리프5세 샤를 4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딸인 이자벨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2세와 결혼했으며 이후에 남편과의 내전을 통해서 남편을 무찌르고 아들인 에드워드 3세를 즉위시키기도 했었습니다.


나바라의 사람들은 프랑스에 반감이 있었고 특히 프랑스의 국왕인 필리프 4세에게 반감이 컸습니다. 이때문에 후아나가 죽은뒤 그들은 필리프 4세가 계속 통치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후아나의 장남인 루이를 나바라의 국왕으로 내세웠으며 1307년 루이는 먼저 나바라의 국왕이 된다고합니다.




후아나의 장남 루이

나바라의 국왕, 프랑스의 국왕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