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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통치 가문들...번외편 3.펜미니드의 튜더 가문 : 오웬 튜더의 가문

엘아라 2020. 2. 14.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웨일스 어는 어떻게 읽는거랩니까..엉엉엉..ㅠ.ㅠ

그냥 대충 영어식으로 읽어야겠습니다. -0-;;;;


유럽의 통치 가문들...번외편 3.펜미니드의 튜더 가문 : 오웬 튜더의 가문


페미니드의 튜더 가문Tudors of Penmynydd (in Welsh: Tuduriaid Penmynydd)은 북웨일스에 위치한 페미니드라는 마을에서 출발한 웨일스의 귀족가문이었습니다. 이 가문의 선조는 13세기 인물이었던 에드니퍼드 퍼한Ednyfed Fychan의 아들들중 한명이라고 합니다. 에드니퍼드 퍼한은 웨일스의 강력한 군주중 한명이었던 허웰린 바우르Llywelyn the Great 와 그의 아들의 신하로 일을했던 인물이라고 합니다.


에드니퍼드 퍼한은 수많은 아들들이 있었고 이들은 각자 지역을 물려받아서 정착했었다고 합니다. 그중 에드니퍼드 퍼한의 두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고로뉘 압 에드니퍼드 Goronwy ab Ednyfed 가 페미니드마을에 정착했으며 그가 바로 오웬 튜더의 직계 조상이 됩니다.




펜미니드에 있는 튜더 가문 사람 (14세기 인물)의 조상


고로뉘의 아들이었던 튜더 헨(Tudur Hen, 튜더 압 고로뉘)는 잉글랜드의 국왕 에드워드 1세에게서 영지를 하사받았었으며 아마 이것이 웨일스 출신이었던 오웬 튜더가 잉글랜드 궁정의 기사가 될수 있었던 배경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이후 가문 사람들은 주로 잉글랜드 궁정에서 일을 하면서 지위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에드워드 3세가 죽고 리처드 2세가 즉위한후 이들 역시 혼란한 잉글랜드 정치 상황에 말려들게 됩니다. 특히 튜더 헨의 증손자들은리처드 2세에게 충성했었으며 이것은 아마도 헨리 4세가 즉위한뒤 이들이 헨리 4세에게 등을 돌리고 웨일스 왕가 출신으로 잉글랜드에 대한 반란을 주도했던 오와인 글린두르Owain Glyndŵr를 지지했었습니다. 하지만 웨일스 지역은 잉글랜드에 다시 한번 복속당했으며, 반란에 가담했던 페미니드의 튜더 가문 사람들은 영지 상당부분을 잉글랜드 국왕에게 뺏기게 됩니다.



오와인 글린두르의 씰


이 잉글랜드에 대한 반란에 가담했던 튜더 헨의 증손자들중 한명이었던 마레드 압 튜더Maredudd ap Tudur는 처형당하거나 용서받았던 형제들과는 달리 최후가 어땠는지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들이 한명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바로 오와인 압 마레드 압 튜더Owain ap Maredudd ap Tudur라는 웨일스 식이름보다는 오웬 튜더라는 잉글랜드 식 이름이 더 유명한 인물입니다.


오웬 튜더의 집안은 웨일스의 반역에 가담했었고 일부 친척들은 처형당했지만 또 일부는 용서받기도 했었습니다. 이때문에 오웬 튜더 역시 용서를 받은 뒤 헝거포드 자작 월터 헝거포드의 가신으로 일했으며 후에 왕실에서 일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에 대해서는 기록이 별로 없으며 주로 전해져오는 이야기들이 많은데 이를테면 그가 아쟁쿠르전투에 참전했었으며 국왕 헨리 5세를 따라 프랑스에 갔었고 그때 왕비가 되는 카트린 드 발루아와 만났으며 왕비에게 호감을 샀었다는 이야기들이 있다고 합니다.


1422년 헨리 5세가 죽고 카트린 드 발루아는 과부가 됩니다. 갓난아기였던 국왕 헨리 6세와 처음에는 함께 지냈지만 그녀의 존재는 애매한 상황이었으며 국왕의 모후로 아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었기에 재혼하는것 역시 마음대로 할수 없었죠. 특히 카트린은 2대 서머셋 공작이었던 에드먼드 보퍼트와 관계가 있었는데 아들의 후견인이었던 시동생이 이 관계를 거부했기에 결혼할수 없었습니다. (이때문에 학자들중에는 카트린과 오웬 튜더의 장남인 에드먼드 튜더가 사실은 서머셋 공작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카트린이 아들마저 뺏기고 고립되는 상황을 맞이했었죠. 아마도 이후 카트린은 자신 주변에 있던 기사중 한명이었던 오웬 튜더와 함께 했을 것입니다. 둘의 결혼에 대해서는 매우 모호한데 언젠지 알수 없는 날짜에 비밀결혼했다는 것을 대부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당대에 헨리 튜더의 정적들은 이들이 결혼한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헨리 튜더가 사생아의 후손이라고 비난하죠. (리처드 3세는 심지어 이중으로 사생아의 후손이라고 비난했다는데, 이것은 헨리 튜더의 모계인 보퍼트 혈통에 대한 비난도 섞여있었습니다만 사실 엄마가 시슬리 네빌로 캐서린 스윈포드의 외손녀인것을 생각해보면 리처드 3세의 비난은 제얼굴에 침뱉는것이죠 -0-;;)


비밀결혼으로 여러 아이를 낳은 카트린에 대해서 의회가 이 사실을 알면서 난리가 납니다. 그녀는 국왕의 허락없이 재혼할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카트린은 막내아이를 낳고 죽었고 그녀의 남편인 오웬 튜더는 역시 법을 어긴 죄로 감금당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처지 역시 애매해지죠. 결국 국왕이자 카트린의 아들인 헨리 6세도 어머니의 비밀결혼과 이부형제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는 후에 동생들과 새아버지에 대해서 너그러운 태도를 취합니다. 헨리 6세는 새아버지에게 연금과 궁정지위를 부여했으며 동생들을 궁정에서 불러들여서 자랄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동생인 에드먼드 튜더에게는 리치몬드 백작 지위도 부여해주기까지합니다.



오웬 튜더의 문장



오웬 튜더의 아들인 에드먼드 튜더는 비록 헨리 6세의 동생이었기만 왕위계승권리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게다가 이때쯤이면 랭카스터 가문쪽 남성후계자들이 점차 바닥나던 시기였기에 헨리 6세와 그 주변 인물들은 국왕의 동생을 왕위계승권리가 있는 여성과 결혼시키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바로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였죠. 랭카스터 가문의 분가인 보퍼트 가문 출신이었을뿐만 아니라 어린시절 아버지가 일찍 죽었기에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상속녀이기도 한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는 너무나 훌륭한 신붓감이었죠. 사실 이때 이미 레이디 마거릿은 약혼중이었는데, 이 약혼을 깨고 결혼한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훗날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는 "성인께 기도해서 답을 얻었다"라고 말하면서 에드먼드 튜더와의 결혼에 자신의 의지가 포함되어있었다는 것을 밝히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 12살이었는데 과연 그랬을까는...흠..)




리치몬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의 문장

헨리 7세의 아버지


에드먼드 튜더와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가 결혼한 직후 장미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에드먼드 튜더는 포로가 되었다가 병사하죠. 그는 죽었지만 그의 어린 아내인 레이디 마거릿은 임신중이었으며 결국 아들인 헨리를 낳게 됩니다. 레이디 마거릿은 아들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들의 이름을 아버지인 에드먼드나 할아버지인 오웬의 이름을 따서 짓지 않고 왕들의 이름인 "헨리"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그녀의 아들은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7세가 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